[제1000회] 장기 저성장 시대의 대응: 일본 사례를 통한 정책적 시사점

등록일
2025.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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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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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교육기획팀

자막

[제1000회] 장기 저성장 시대의 대응: 일본 사례를 통한 정책적 시사점
(2025. 06. 13(금),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학과 이창민 교수)

안녕하세요, 방금 소개받은 한국외대 이창민입니다. 저는 오늘 일본 사례를 통해서 장기 저성장 시대의 한국의 대응, 이런 이야기를 좀 할까 하는데요. 요즘 일본 여행도 많이 가시고, 워낙 또 유튜브나 이런 것들이 잘 돼 있어서 일본을 너무 잘 아시는 분들이 많아서. 웬만한 이야기는 다들 아시는 얘기가 될 거 같고 해서. 제가 생각하는 좀 저만의 관점을 섞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1. 장기저성장의 실체 - 잃어버린 30년을 한국이 따라간다?]

일단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일본이 한때 전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경제 국가이다가, 최근 한 30년 동안 계속해서 순위도 하락하고 소위 말하는 장기 침체의 늪에 빠져 있기 때문인데요. 여기 그래프에서 보시면 위에가 일본의 경제 성장률이고, 밑에가 한국의 경제 성장률인데. 일본이 30년 동안 경제 성장률이 계속 하락했다고 하는 건 상식적으로 알겠는데, 최근에 한국도 일본을 닮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지난 30년. 지난 30년이 아니죠, 고도 성장기 때부터 보면 고도 성장기에는 한 10%. 9%에서 10% 정도 성장을 했고요. 고도 성장기는 1955년부터 한 73년 정도까지가 고도 성장기입니다. 그다음에 안정 성장기라고 하는데, 74년부터 한 85년 또는 한 90년 정도까지. 4%에서 5% 매년 성장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잘 아시는 90년 91년에 버블이 붕괴하고 나서, 최근까지 경제 성장률이 이제 1%가 채 안 됩니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은 아직도 꽤 높은. 일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유지하고는 있습니다만. 버블 붕괴 후 일본이 자산시장발 부채 누증, 저출산 고령화, 글로벌 수평 분업화라고 하는 세 측면에서 구조 변화에 직면해 있었다고 하면, 최근 한국도 구조적으로 비슷해지는 게 아닌가. 한국 같은 경우에는 부동산발 가계 부채, 그다음에 저출산 고령화는 이제 한국이 일본보다 훨씬 속도가 빠르죠. 그다음에 글로벌 통상환경이 최근에 이제 트럼프 2.0 시대라고 해서 정말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우리가 관심을 가지게 된 거는 결국에 한국이 일본을 쫓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거 같습니다.

[1. 장기저성장의 실체 - 첫 번째 미스테리]

그런데 이제 세 가지 미스터리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고, 그 뒤에 이제 이 미스터리에 대한 답을 제시하면서 설명을 이어갈까 하는데요. 일단 첫 번째 미스터리입니다. 90년 91년에 일본이 버블이 붕괴하고 나서 자산 가격이 이제 폭락을 했으니까요. 이게 이제 회복되기까지 몇 년이 걸릴까 생각을 해 보면, 많은 분들이 90년 91년에 자산 시장이 붕괴하고 나서 지금까지도 회복이 잘 안 되고 있다. 이런 말을 많이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제 잃어버린 30년이란 말을 쓰겠죠. 그런데 이 버블이 붕괴한 거하고 장기 저성장하고는 조금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버블이 붕괴하고 나서 회복까지 걸리는 시간, 물론 이제 그 회복을 자산 가격을 회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할 것인지, GDP 갭을 회복하는 데 걸린 시간, 실질 구매력이 회복되는 데 걸린 시간으로 할 것인지에 따라서 회복의 시간이 좀 다르긴 하겠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2000년대 초반에 있었던 닷컴버블. 닷컴버블이 회복되기까지 보통, 아 이 그래프는 지금 이제 GDP 갭으로 측정한 건데요. 닷컴버블이 회복되기까지 걸린 시간이 한 2-3년 정도 걸렸다고 보통 이야기를 합니다. 그다음에 2008년 9년에 있었던 글로벌 금융위기. 글로벌 금융위기가 꽤 회복하는 시간이 오래 걸린 편인데요. 주식 시장을 보느냐, 아니면 부동산을 보느냐에 따라서 좀 다른데. 가장 긴 걸로 봤을 때 한 9년에서 10년 이렇게 걸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버블 붕괴 이후에 30년 동안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하는 건, 주식 시장은 최근에 회복했으니까요. 부동산 시장은 아직 회복 못 하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30년씩 시간이 걸렸다고 하는 거는 굉장히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가능성은 두 개가 있죠. 버블 붕괴하고 뒤에 30년 동안, 잃어버린 30년이 별로 관계가 없든지. 아니면 그 30년이라고 하는 건 실재하지 않는 레토릭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제로 30년이 아닌데 우리가 30년이라고 그냥 퉁쳐서, 내용적으로는 잘 안 따져보고 그냥 30년.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수도 있습니다. 역사상 버블 회복하는 데 시간이 제일 길게 걸렸다고 생각되는 게 대공황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대공황을 보면 GDP 회복하는 데는 한 10년 걸렸고, 주가가 한 25년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 굉장히 인류사를 통틀어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굉장히 20년 이상, 30년씩 이렇게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건 굉장히 드문 현상이다. 드문 현상이라는 거는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1. 장기저성장의 실체 - 두 번째 미스테리]

또 한 가지는 두 번째 미스테리. 잃어버린 30년이라고 하는데, 일본은 전후에 경기 순환을 번호를 붙여 왔습니다. 1순환, 2순환, 3순환 이런 식으로. 그래서 지금 이제 17순환. 순환으로 치면 17순환인데. 이게 이제 내각부가 사후적으로 순환의 시작과 끝을 정하기 때문에 아직 이 17순환이 끝났는지, 아니면 계속되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여하튼 잃어버린 30년 안에 순환이 다섯 번 포함이 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 두 번은 전후 가장 긴 호황과 두 번째로 긴 호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후 가장 긴 호황이 이자나미 호황이라고 해서 2002년 1월부터 2008년 2월까지 73개월 동안의 호황이고요. 전후 두 번째로 긴 호황이 여러분들 잘 아시는 아베노믹스 때 아베노믹스 경기라고 해서, 이게 이제 2012년 11월부터 2018년 10월까지 71개월 있었습니다. 뭔가 이제 모순된 느낌이 들죠. 일본 역사상 가장 긴 호황과 두 번째로 긴 호황이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하는 30년 안에 들어 있다는 거는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거 같은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실제로 이자나미 경기를 보면, 연평균 명목 GDP 성장률이 0.94%, 실질 GDP 성장률이 1.63%. 아베노믹스 경기는 명목이 1.88. 실질이 0.94입니다. 이자나미 경기에서 이제 실질이 명목보다 높은 이유는 디플레이션이었기 때문이죠. 어찌 됐든 물가 상승률이 2%는 고사하고 1% 전후. 이자나미 때는 마이너스였고요. 그래서 저는 이거를 이제 저온 호황, 차가운 호황. 뜨겁지 않다. 호황은 호황인데 호황이라고 할 수 있나 해서, 저온 호황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왜 30년 동안 발생한 호황은 좋은 호황이 이어지고 있는 걸까? 이게 두 번째 미스테리입니다.

[1. 장기저성장의 실체 - 세 번째 미스테리]

세 번째는 지금 이제 제가 발췌해 온 게 닛세이 기초연구소라고 하는, 우리로 치면 싱크 탱크인데. 일본의 유명한 싱크 탱크에서 1995년 1월 11일에 분석한 부분을 제가 이제 발췌를 해 왔는데요. 거기 빨간 글씨를 해석을 하면, 일본의 지금 현황은 회복의 서광이 비치고 있다. 회복의 정착을 목표로 하고 있는 단계이다. 이런 표현이 등장합니다. 1995년인데 회복되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1996년까지 일본에서는 경제 위기라는 생각을 거의 못 했습니다. 한 98년 정도가 돼서 당시 총리였던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잃어버린 10년에서 회복해야 된다는 표현을 하면서 잃어버린 10년이란 표현이 이제 널리 쓰이기 시작했고요. 이거 구글 트렌드 같은 거 보면 잃어버린 10년은 98년에 제일 많이 쓰였고, 잃어버린 20년은 2014년부터 많이 쓰이기 시작했고, 그게 있습니다. 유행하는 게. 결국에 우리가 생각했을 때 버블이 붕괴되고 경기 침체를 했을 것 같은데, 경기 침체에 들어갔다는 생각을 아무도 못 했다는 거죠. 96년까지는 경기가 좋다 이렇게 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왜 버블이 붕괴됐는데 경제 위기라는 생각을 아무도 못 했을까? 이게 세 번째 미스테리입니다.

[2. 40년 체제의 후유증 - 150년 자본주의 역사]

이 세 가지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큰 틀에서 일본의 경제사 전반을 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은 자본주의가 자생적으로 생겨난 나라가 아니죠. 서양에서 제도나 조직을 이식을 해서 자본주의를 정착시킨 그런 나라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역사가 한 150년쯤 됩니다. 시작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명치유신입니다. 명치유신이 1868년에 일어났는데, 지방 사무라이들이 소위 말해서 쿠데타로 세력을 잡고, 새로운 명치 정부를 신정부를 연 거죠. 그런데 68년에 명치유신이 있고 나서 바로 자본주의가 시작이 된 게 아니라, 해외로부터 유학을 가서, 제도나 시스템을 배워 와서 이식시키기 시작한 게 188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한 30년 정도 됩니다. 이때 주식회사도 배워오고요. 그러니까 유한 책임이라는 거는 배워야 되는 거지, 자연 발생적으로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주식회사 제도도 배워오고, 은행 제도도 배워오고. 이러면서 자본주의를 이식하는 과정이 한 30년 동안. 1880년부터 1910년까지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어느 정도 정착이 된 자본주의가 잘 운영이 됐던 게 그 후에 한 30년 이렇게 됩니다. 이거를 이제 제가 일본 1.0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1940년대부터 이제 태평양 전쟁이 발생을 하고, 전쟁 이후에는 이제 미 군정기도 겪고. 고도 성장기 전반부 정도까지 1900 한 60년대까지. 그래서 194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자본주의에 큰 변화가 이제 생깁니다. 이건 뒤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소위 말하는 일본형 자본주의라는 걸로 변화가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보셨을 종신고용, 연공서열 임금 제도, 메인뱅크 시스템, 행정지도 이런 것들.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일본형 자본주의인 거죠. 그게 이 시기에 한 30년 정도 만들어졌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이렇게 만들어진 일본형 자본주의가 쭉 한 30년 또 잘 기능을 했습니다. 이게 일본 2.0이라고 제가 불렀고요. 90년 91년에 버블이 붕괴됐지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초기에는 그 이전과 크게 다름없이 자산 가격만 붕괴한 채로 경제가 이렇게 흘러가다가, 한 98년 정도부터 제대로 된 위기가 닥치면서 다시 세 번째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제가 이렇게 일본 1.0, 2.0, 3.0 해가지고 책을 지금 쓰고 있는데. 타이틀을 재팬 캐피털리즘 3.0으로 하려고 생각하고, 아마존에 일본 아마존에 찾아보니까 일본 3.0이라는 책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깜짝 놀라서 주문을 해서 봤더니, 저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그분은 정치로. 정치 제도로 일본 1.0, 2.0, 3.0 이렇게 했더라고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지금 타이틀을 변경하려고 지금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비슷한 생각을 다들 하고 있구나.

[2. 40년 체제의 후유증 - 일본 1.0과 자본주의 이식]

150년인데요. 제가 이제 일본이 일본 1.0에서 일본 2.0으로 넘어갈 때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처음에 일본이 자본주의 제도를 도입을 했을 때, 여기 사진에 보시면 이게 이제 신정부의 관료들입니다. 가운데에 상투를 틀고 있는 사람. 일본에서는 이걸 촌마게라고 하는데. 이와쿠라 도모미라고 하는 특명전권 대신이고. 그 주위에 이제 유명한 일본의 정치인입니다. 1시 방향에 왼쪽 얼굴을 살짝 이렇게 돌리고 있는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 나오는 사진 찾아보시면 거의 이렇게 한시 방향에 서 있습니다. 이게 자기가 자신 있는 포즈죠. 방향이.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인데. 신정부의 주요한 사람들이 2년 동안 미국 유학을 갔습니다. 미국과 유럽을 돌면서 여러 가지 제도와 시스템을 배워 옵니다. 이 사진이 찍혔을 때가 샌프란시스코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이제 태평양을 건너서 도착해서 사진 찍고, 이제 미국 횡단하면서 진행을 하는 건데. 이 가운데 있는 이와쿠라 도모미가 상투를 시카고쯤 가서 자릅니다. 가다 보니까 너무 부끄러웠던 거죠. 처음에는 일본 정신 생각하다가, 나중에 이제 귀국할 때는 양복 입고 귀국을 합니다. 이 사람들이 가서 배워왔던 게 크게 주식회사 제도, 중앙은행의 운영 요령 이런 것들을 배워왔습니다. 특히 주식회사 제도를 이식해서 가장 먼저 만든 이 산업. 가장 먼저 발전시킨 산업이 은행하고 철도입니다. 그리고 이 은행을 발전시켜서 은행이 이제 주식 담보 대출이란 제도를 이용해서 여러 회사들을 설립할 수 있게 기반을 잡았습니다. 당시 기업들은 그래서 주식 시장에서 대부분 자금을 조달했습니다. 주식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을 했는데. 당시에는 주식 시장이 이제 막 생겨났기 때문에 주주가 될 만한 투자자가 별로 없었죠. 그래서 초기에 투자자를 구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당시에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두 부류였습니다. 한 부류는 자본을 축적한 상인들. 그다음에 한 부류는 몰락한 귀족 집안이었습니다. 왜 몰락했냐면, 명치유신 하기 전 에도 시대에는 각 지역마다 다이묘라고 하는 가장 높은 사무라이가 그 지역을 봉건 영주처럼 다스리죠. 그래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지역에 말하자면 지방세를 거둬서, 지역의 행정을 하는 건데. 행재정을 하는데. 260개 정도 되는 지역이 있었습니다. 명치유신은 그 사람들의 세금 걷는 권한을 뺏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세금 걷을 수 있는 권한을 반납하는 대신에 국공채를 다 받았습니다. 그 국공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자로 생활을 했죠.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 주식 투자를 하라고, 국공채를 팔아서 주식 투자를 하라고 누군가가 강력하게 권유를 해야 됐고, 그때 강력하게 권유를 한 사람이 지금 일본의 신권 만 엔짜리 지폐에 있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입니다. 이 시부사와 에이이치 같은 사람들이, 비즈니스 리더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식 투자를 하도록 많이 유도를 해서 그래서 초기의 주주들은 대부분 귀족들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이 사람들이 굉장히 권리 의식도 강하고, 배당률을 굉장히 높은 배당률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일본 기업들이 당시 1920-30년대 일본 기업들의 가장 큰 걱정은 배당률이 너무 높은 게 걱정이었습니다. 배당률이 너무 높아서 기업의 투자, 미래를 위한 투자가 쉽지 않은. 이게 기업이 해결해야 될 가장 큰 문제였고. 또 노동자들은 1원이라도 더 주면 다른 회사로 이직이나 전직을 그냥 하는. 굉장히 신자유주의적인. 지금의 개념으로 보면 그런 노동 시장에 가까웠습니다. 이게 일본이 처음에 이식하고 정착시킨 자본주의의 모습입니다.

[2. 40년 체제의 후유증 - 일본 2.0과 일본형 자본주의의 탄생]

그래서 여기 그래프를 보시면 이게 월간 이직률인데. 1945년을 기점으로 45년 이전에, 그러니까 전쟁 이전에. 전쟁 이전과 전쟁 이후를 비교하면 일본의 노동자들의 월간 이직률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45년 이전에는 이직률이 굉장히 높죠. 그러니까 이 직장, 저 직장 막 이렇게 다녔다는 얘기고요. 45년 이후에는 굉장히 낮아졌습니다. 미국하고 비교할 때. 그래서 1940년대에 일본 경제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거죠. 변화를 촉발시킨 계기가 된 거는 전쟁입니다. 전쟁이 발생을 하니까. 당시는 총력전이라서 정부가 군대뿐만이 아니라 모든 기업, 민간인들까지 총동원해서 전쟁을 치러야 되는데. 기업들에게 무기, 예컨대 쉽게 직관적으로 얘기를 하면 도시바에게 탱크나 소총을 만들려고 명령을 하고 미쓰비시 중공업에게 전투기를 만들라고 했는데, 기업들이 그거를 쉽게 잘 안 듣죠. 주주들이 반대를 합니다. 그래서 이 주주들의 반대를, 주주들의 힘을 약화시키지 않으면 전쟁이 안 되겠구나 하고 일본 군부가 판단을 하고. 주주총회를 없애 버렸습니다. 주주총회를 없애고 각 사업장 공장에 정부에서 이제 파견 나가서 관리자를 파견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일본에는 약한 주주가 이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주주들이 굉장히 주주 권리를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 착한 주주라고 우리가 보통 부르는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일본 기업들의 거버넌스가 일견 보면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이 주주들의 힘이 굉장히 약한 건데. 그 시초가 이제 전쟁 때 시작이 된 거죠. 그다음에 기업들이 결국엔 주식을 통해서 자금 조달을 하게 되면 정부 말을 잘 안 듣겠죠. 그래서 담당 은행들을 지정을 해 줍니다. 그리고 코퍼레이트 파이낸싱은 전부 다 은행을 통해서만 하도록. 그리고 그 은행은 상위의 국책은행들이 또 관리를 하고. 그 국책은행들의 정점에는 일본은행, 중앙은행이 있습니다. 그렇게 중앙은행을 정점으로 해서 모든 금융을 통제적인 금융 시스템을 만들어서 기업들이 은행을 통해서만 자금을 조달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야 금융을 통해서 기업들을 컨트롤하기가 쉽겠죠. 전쟁하기 쉬운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기업들도 이때는 카르텔이나 트러스트를 권장했습니다. 그래서 각 산업 분야별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다 짝을 지어서 피라미드형으로 서로 협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게 나중에 전쟁 이후에 도요타 생산 시스템의 원형이 됩니다. 도요타 생산 시스템이 다품종 대량 생산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도요타가 최종 조립만 맡고 나머지 중간 부품은 전부 다 1차 하청 업체, 2차 하청 업체 등등을 통해서 조달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거든요. 그래서 이런 시스템 자체가 사실은 전쟁을 하기 위한 통제 경제 시스템에서 시작이 된 거죠. 행정 지도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대장성, 통산성 이런 일본의 전쟁 주체 정부에서 기업들을 컨트롤하기 위해서 행정 지도라는 것도 도입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전쟁 때문에 그렇게 한 건 이해를 했는데, 전쟁 이후에 그게 이어졌다는 게 좀 미스테리하죠. 근데 이제 전쟁이 끝나고 나서 사실은 군인들은 다 추방이 됐는데, 제일 중요한 대장성 관료들은 그대로 다시 다 기용이 됐습니다. 사실 대장성 관료들이 지금 우리로 치면 기재부 관료들인데. 이 통제적인 금융 시스템을 만든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그대로 전쟁 이후에 그걸 유지를 했고. 때마침 가트 체제하에서, 자유무역 체제하에서 일본이 모노즈쿠리라고 하는, 제조업 더하기 장인 정신이죠. 굉장히 품질에 집착하는 그런 제조업으로 전 세계에 메이드 인 재팬 제품을 수출하면서 일본이 이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1940년대에 만든 시스템이 우연하게도 1960년대 70년대 전 세계의 어떤 글로벌 통상 질서하고도 잘 맞아떨어지는. 운이 굉장히 좋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1968년에 일본은 전 세계 2위의 GDP, 총 GDP가 2위로 올라섰고요. 이거는 2010년 중국에게 2위를 내줄 때까지 유지가 됩니다. 1인당 GDP로 하면 한 90년대 후반에 세계 2위에서 5위, 4위까지 달성이 되는.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됩니다.

[2. 40년 체제의 후유증 - 왜 불황인 줄 몰랐을까?]

그런데 이게 90년 91년에 버블이 붕괴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불황이라고 느끼지 않았느냐? 이게 대차대조표 불황이 이어졌기 때문인데요. 이 대차대조표라는 게 있죠. 여기 보시면 왼쪽에 자산 그리고 오른쪽에 부채와 자본을 합치면 양쪽이 같아야 되잖아요. 근데 자산 가격이 폭락을 하게 되면 이제 이 자산을 팔아서 부채를 갚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서 원래대로라면 도산을 시키든지 해야 되는데, 기업들이 도산을 하게 되면 가장 곤란한 건 은행입니다. 담당 은행들이죠. 메인뱅크라고 하는. 왜냐하면 담당 기업이 파산하게 되면 부실 채권을 굉장히 많이 끌어안게 되니까, 재정 건전성이 위협받기 때문에 그 기업이 파산하지 않도록 추가적인 대출을 해 줍니다. 은행들이. 그렇다 보니까 기업은 새로운 투자는 고사하고 부채 줄이는 데에만 온 신경이 집중돼서, 다른 건 안 하고 부채만 줄여 가는 거예요. 은행은 또 그 기업을 도와주고. 그 상태에서 우리는 이걸 좀비 기업이라고 합니다. 살아는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생명 활동을 하지 않는 거죠. 등기상에는 회사가 살아 있는데 새로운 신규 투자도 하지 않는 그런 기업들이 생기게 되고. 그래서 이 당시에 버블 붕괴를 겪고 나서 파산하는 기업이나 실업률은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기업이 파산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은행이 계속해서 추가 대출을 해 주니까. 그런데 그런 과정 중에 기업의 체질이 바뀌었죠. 여기 보시면 그래프에서 이게 자금 과부족 표인데요. 그래프인데. 회색이 가계고 파란색이 기업입니다. 원래대로라면 회색인 가계가 플러스 저축을 하고, 기업이 마이너스 저축을 하는 게 바람직한. 중계해 주는 역할이 이제 금융 기관이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파란색이 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한 중반까지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전환이 되죠. 일본에서 기업이 투자하는 주체가 아니라 저축하는 주체로 바뀐 겁니다. 그래서 지금 일본은 가계도 기업도 저축을 하고 있고, 그 저축된 돈을 결국엔 누가 써야 되니까 보시면 주황색이 지금 마이너스 저축을 하고 있죠. 주황색이 정부입니다. 정부가 빌려 쓸 수밖에 없는 구조이고요. 그래서 이런 상황이 길어지면 일본은 돈 빌려 줄 사람은 많은데 돈 빌릴 사람이 없는. 우리가 유동성 함정이라고 얘기하는 더 이상 금리가 내려갈 데도 없고, 금리가 낮아도 투자도 늘지 않고 하는 그런 상황이 된 겁니다. 그래서 이게 이제 세 번째 질문. 왜 버블이 붕괴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황이라고 느끼지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고요.

[2. 40년 체제의 후유증 - 일본 3.0: 은행 위기와 금융시장 개혁]

결국 이제 이 위기는 97년에 일본에서 은행 위기가 오면서 위기가 본격화됩니다. 산요 증권, 야마이치 증권 이런 유명한 증권 회사가 파산하고, 이후에 이제 은행들이 파산하면서 본격적인 위기가 시작이 됐고요. 이때 금융시장 개혁이 시작이 됐습니다. 98년부터 본격화됐고. 그러면서 지금 일본의 3대 메가뱅크가 그때 탄생했고요. 2001년에 대장성이 해체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 불량 채권이 정리되는데 한 10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98년부터 시작해서 한 2007년쯤 되면 일본의 금융 시장이 40년 체제, 과거의 통제적인 금융 시스템에서 어느 정도 선진화돼서 좀 개혁이 됐습니다. 한 10년 걸렸습니다.

[2. 40년 체제의 후유증 - 일본 3.0: 노동시장 개혁]

노동 시장도 그때부터 개혁이 됐습니다. 98년부터 구조조정이라는 게 시작이 됐습니다. 원래 일본은 장기고용, 연공서열 임금제도니까 중간에 명예퇴직이나 조기 퇴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명예퇴직, 조기 퇴직이 생겼습니다. 특히 2002년에는 4만 명 정도 되는 굉장히 많은 인원이 조기 퇴직, 명예퇴직을 했고요. 비정규직 노동 시장도 이때부터 늘어나기 시작해서 지금 일본의 한 38%. 그러니까 정규직 대 비정규직이 6대 4 정도 됩니다. 그렇지만 최근에 워낙 일본이 인구 감소로 일손 부족 때문에. 어찌 됐든 일자리는 있는 상태고, 정년 이후까지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지금 본인이 원하면 70세까지 일을 할 수 있는 직장이 많이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거는 98년 무렵부터 노동 시장도 개혁이 시작이 됐고, 이거는 아까 금융 시장은 자본 시장은 한 10년 만에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다 그러는데, 이 노동 시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출구, 종신고용은 많이 붕괴가 돼 가고 있는데 입구는 아직도 좀 여전히 유지가 되는 측면이 강합니다. 입구가 뭐냐면, 신졸 채용이라고 해서 대졸 공채입니다. 일본은 중도 채용이 잘 없습니다. 대학교 졸업하고 바로 직장 가야지, 한 몇 년 어학연수 가고, 공부 좀 하다가, 고시 공부하다가 이렇게 취업하면 취업이 되게 어렵습니다. 잘 이해를 안 해 줍니다. 공백기에 대한 설명이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신졸 채용, 대졸 공채 문화는 아직도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편입니다.

[2. 40년 체제의 후유증 - 일본 2.0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자나미경기]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자본 시장, 노동 시장 구조 개혁은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긴 했는데. 사실은 제일 중요한 구조 개혁이 아직 안 됐었습니다. 뭐냐면 자본과 노동을 투입해서 엮어 주는 생산 조직. 바로 기업. 기업에 대한 지배 구조 개혁이나 이 기업에 대한 개혁이 충분하지 않았던 거죠. 사실은 경제를 움직이는 거는 그 세포 하나하나가 기업이거든요. 그래서 기업이 체질 개선이 안 된 상태가 결국에는 대차대조표 불황 때문에 이자나미 경기 때 저온 호황이 이어진 이유고요. 운도 안 좋았습니다. 고도 성장기 때는 굉장히 운이 좋았는데. 일본이 왜 운이 안 좋았냐면 금융 시장, 노동 시장 개혁을 막 끝내고 2007년 무렵에 이제 제대로 좀 성장해 보려고 하는데, 아시다시피 2008년 9년에 글로벌 금융위가 있었고. 2011년에는 동일본 대지진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잃어버린 10년이 잃어버린 20년으로 연장이 됐습니다.

[3. 아베노믹스의 재평가 - 반쪽짜리 성공]

그래서 그 이후에 이제 아베노믹스라는 게 시작이 되는데요. 아베노믹스가 시작이 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했었습니다. 이게 디플레이션 탈출이 지상 최대의 과제라고 이야기하면서 등장했는데, 과연 구조 개혁을 하지 않고 디플레이션 탈출에 방점을 찍는 게 과연 맞을까? 그런데 결과적으로 하여튼 10년 동안 통화를 팽창시켰는데, 결과는 그렇게 썩 성공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그렇다 해서 실패했다고 얘기하기도 좀 어렵습니다. 왜냐면 지금 이 본원 통화가 증가되면 기대 인플레이션율이 상승해서 엔저가 되고, 실질 금리가 하락하고, 주가 상승하고, 이게 쭉 가는 이 흐름이 아베노믹스 양적 완화할 때 만든 로직이거든요. 이렇게 될 것이다. 그래서 소비자 물가가 상승할 것이라고 봤는데. 본원 통화는 증가시켰는데, 엔저는 됐지만 수출은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상하죠. 엔저는 됐는데 수출이 증가하지 않아서, 여러 가지 이제 당시 일본 경제를 분석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의문을 좀 남겼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또 물가는 목표했던 2%는 아니지만 그래도 50% 정도는 상승을 또 했습니다.

[3. 아베노믹스의 재평가 - 저온호황]

어떻게 봐야 될까. 아베노믹스 때는 왜 저온 호황이 될 수밖에 없었냐면, 많은 기업들이 1985년 플라자 합의 때부터 시작이 됐는데요. 엔고 때는 M&A 때문에 해외로 나갔고, 나중에 일본이 저성장이 되니까 자본 수익률이 저하돼서 해외로 생산 기지를 이전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일본 기업들 대부분 지금 해외 생산 거점 공장을 가지고 있죠. 그렇다 보니까 엔저가 돼도 수출이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다만 엔저가 되면 해외에서 벌어서 해외에서 투자하는 일본 기업들 입장에서는 엔 환차액이 발생을 하겠죠. 반대로 엔고가 되면 엔 환차손을 입습니다. 근데 일본 기업들은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현지 판매 가격을 많이 바꾸지 않습니다. 기업이 손해를 감수하든 기업이 이익을 보든 유지를 하는 전략이기 때문에 이 아베노믹스 때 엔저가 됐을 때는 수출은 많이 늘지 않았지만 해외 생산 거점을 가지고 있는 기업들이 엔차액을 많이 누리면서 영업 이익이 많이 개선이 됐습니다. 그런데 다 해외에서 벌어들인 돈이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국내에는 투자도 할 유인이 별로 없고, 국내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 줄 유인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기업들은 호황인데 가계는 불황인 상태가 이어지는 거죠. 반쪽자리 호항. 저온 호항이 됐던 겁니다.

[3. 아베노믹스의 재평가 - 러우전쟁 이후의 일본경제]

다만 이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그러니까 2022년 4월 이후의 상황이 좀 반전이 됐습니다. 물가가 오르기 시작하고 있죠. 지금 일본 물가가 그때 2022년 4월 이후 지금까지도 전년 동기 대비 2% 이상 계속 오르고 있고요. 초과 달성하고 있고. 춘투의 임금 상승률도 작년에도 5%대 상승했는데 올해도 5%대 상승했습니다. 주가도 폭발적으로 올랐죠. 제가 1989년 12월 29일 종가를 항상 외우고 있는 게 한 34년 동안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38,915포인트, 38,915엔이었는데. 이게 2024년에 전고점을 돌파했습니다. 드디어 34년 만에. 그래서 7월 달, 작년 7월 달에 42,000까지 올랐다가 지금 오늘 보니까 38,000 되더라고요. 일본에서 주가가 이렇게 오를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만큼 2022년부터 뭔가 일본 사회가 변한 거죠. 다만 아베노믹스 때 했던 통화정책이 지금 효과가 드러난 거냐? 그렇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통화정책은 경기 대응에 대한 수단이지, 경제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수단은 아니기 때문에. 결국에는 뭔가 구조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이 들고, 최근 한 10년 동안의 구조적인 변화 하나가 기업 경쟁력 제고, 또 하나가 인구 구조 변화 대응. 두 가지 일단 들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시대 구분을 새롭게 해야 되지 않을까. 잃어버린 20년까지 하고, 그 뒤에 2013년부터는 구조 변화하는 일본으로 뭔가 시기를 나눠야 되지 않을까. 이렇게 보고 있는 겁니다.

[3. 아베노믹스의 재평가 - 40년 체제(쇼와뽀이) 기업들의 한계]

2010년대에 그래서 기업 대분기라고 제가 이름을 붙였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일본의 거의 모든 기업들이 90년대까지 별로 크게 위기를 못 느낍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도산하지도 않고, 실업률이 올라가지도 않고. 그냥저냥 버팁니다. 98년에 97년부터 은행 위기가 생겼는데, 은행은 도산했는데 기업들은 감량 경영해야 된다, 위기에 대비해야 된다고 하면서 조금 힘들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냥 버텼습니다. 일본에서 기업들이 언제 제일 많이 망했냐면, 2008년 9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모든 기업들이 악화가 됐습니다. 영업 이익도 악화됐고, 망한 기업도 많습니다. 그러고 나서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에 2010년대가 되면 이제 나눠지기 시작합니다. 어떤 기업들은 환골탈태해서 전혀 새로운 기업으로 다시 태어났고요. 어떤 기업들은 서서히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지금 제가 여기 올린 2010년대 일본 기업의 부정부패 사례는 2010년대 들어서 일본 기업들이 유달리 기업의 부정부패 사건이 많이 보도가 됐습니다. 지금 보면 이게 2010년대에 변화에 성공하지 못하고 서서히 도태되어 가는 기업들이죠. 올림푸스라든지 도시바, 닛산 이런 기업들이 연비 조작을 했다든지, 회계 기준을 조작을 했다든지, 분식회계를 했다든지 이래서 계속 뉴스가 됐던 그런 기업입니다.

[4. 기업의 대분기 - 도시바의 몰락]

지금부터 제가 이 시기에 성공한 기업과 실패한 기업의 사례를 하나씩 예를 들어 드리려고 합니다. 실패한 기업의 대표적인 주자가 이 도시바입니다. 고도 성장기에 수출주도형 일본 제조업을 상징하는 3대 기업 중에 하나가 도시바거든요. 도요타, 소니, 도시바 이렇게 3대 기업인데요. 도시바 뭐 만드는 회사인지 혹시 아시나요? 이게 요즘에 잘 안 나오니까. 옛날에 노트북 도시바 유명했고요. 좀 이따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만, 노트북이라는 걸 최초로 만든 회사가 도시바입니다. 랩탑이라는 개념을. 그래서 이걸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도시바는 150년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엄청 오래된 회사죠. 1875년에 설립했고요. 일본 정부와 모든 걸 같이 해 왔습니다. 일본 정부 말을 제일 잘 듣고, 정부가 하라는 걸 열심히 해서 커온 회사입니다. 정부가 원자력 한다 그러면 원자력하고, 정부가 전쟁한다 그러면 열심히 전쟁에 협조를 해서 커온 회사입니다. 원래 이제 도쿄 시바우라 제작소, 도쿄 전기 이렇게 합쳐서 도시바가 된 건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소총하고 탱크 만들던 회사거든요. 그래서 이제 전쟁 끝나고 나서 전기 회사로 이렇게 점점 성장을 했는데. 도시바에서 사장이 되려면 반드시 갖춰야 될 조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 도쿄 대학을 졸업해야 됩니다. 두 번째, 중전 부문 출신이어야 됩니다. 중전이 뭐냐면 무거울 중자입니다. 그러니까 가전이 아니라 중전은 터빈, 발전기, 변압기, 정류기 이런 거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도쿄 대학을 나오고 중전 부문에서 잔뼈가 굵어야 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일본 파벌 사회죠. 그래서 그 외에는 사장이 되기 힘들었는데. 90년대 일본 기업들이 위기에 처하면서 도시바도 이제 새로운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파벌 위주였다. 도쿄 대학 출신 이외의 사람이 이제 사장이 될 수 있어야 된다고 해서 열심히 인물을 물색했는데, 그때 사장 후보로 올라온 사람이 여기 사진에 맨 왼쪽에 있는 니시무로 타이조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니시무로는 비주류입니다. 일본에서 비주류 인생을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형이 둘이 있었는데, 형 둘이 도쿄 대학을 갔어요. 그래서 이제 엄마가 굉장히 치맛람이 강하신 분이라 가지고. 이렇게 나이 드신 분한테 엄마라고 하니까 좀 죄송한데. 삼수를 했습니다. 삼수를 했는데 결국 도쿄 대학을 못 들어가고, 게이오 대학 경제학부를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게이오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서 도시바 미국 법인에서 14년 동안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 당시 도시바가 1987년에 코콤 사건이라고 수출 규제가 돼 있었는데, 수출 통제가 돼 있던 소련에 선반을 팔면서 이게 들켜 가지고 굉장히 곤란한 지경에 빠졌습니다. 근데 이 일을 해결한 사람이 바로 이 니시무로였습니다. 니시무로가 14년 동안 미국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영어를 굉장히 잘해서. 니시무로가 도시바의 코콤 사건을 잘 해결하고 그걸로 낙점을 받아서 사장이 됐습니다. 니시무로는 문제가 뭐가 있었냐면 굉장히 직함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제 이 니시무로가 별별 직함을 다 합니다. 우정공사 사장도 하고, 상공회의소 이런 거. 증권 거래소 사장도 하고, 별의별 직함을 좋아하는데. 이 직함을 좋아해서 나중에 도시바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니시무로가 그러니까 비 도쿄대 출신으로 처음 사장이 된 거죠. 사장이 되고 나서 이제 사장 임기가 4년이거든요. 4년 하고 나서는 회장이 됩니다. 회장을 하고 나서는 상담역, 그다음 고문 이런 식으로. 일본의 기업은 보통 한 80대까지 합니다. 한번 하면. 그러니까 사장이 그냥 지나가는 자리예요. 그러니까 대과 없이 큰 실수 없이 그냥 4년 동안 잘 버티면 되는 자리입니다. 뭔가 새로운 거를 시도할 필요가 없죠. 그래서 니시무로가 회장이 되면서 사장 후보로 추천한 게 그다음 사장인 사진에 있는 니시다 아쯔토시라는 사람입니다. 니시다는 도쿄 대학을 나왔을까요, 안 나왔을까요? 안 나왔겠죠. 왜냐면 니시무로가 뽑아야 되잖아요. 그래서 니시무로가 도쿄대학을 안 나온 사람 중에 비주류가 누가 있나 찾아보니까 니시다가 있었습니다. 니시다도 비주류 중에 비주류입니다. 일단 니시다도 삼수를 했습니다. 여기서 이제 웃어야 되는데 아무도 안 웃으시네요. (웃음) 니시다도 삼수를 했습니다. 기본 삼수를 해야 이제 도시바 사장이 되는 겁니다. 삼수를 해서 결국 도교대를 못 가고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갔습니다. 근데 이제 도쿄 대학에 대한 미련이 있다 보니까 대학원을 진학했습니다. 도쿄 대학으로. 도쿄대 대학원 정치사상사 전공 박사 과정으로 진학을 했습니다. 정치사상사는 배고픈 학문이잖아요. 그러니까 아예 돈 벌 생각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계속 이제 정치사상사 전공을 하던 와중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도쿄 대학에 유학으로 온 이란 여학생하고 국경을 뛰어넘는 사랑에 빠져서, 도중에 하던 공부를 때려치우고 이란으로 갑니다. 멋있는 사람이죠. 그래서 일단 이란으로 가서 전업 주부가 됐습니다. 그래서 어 전업주부를 하는데, 부인이 보니까 너무 답답하잖아요. 그래서 부인이 이란에 있는 이란 도시바 법인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 부인이 이란의 굉장히 유력한 자제 가문의 딸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서 우리 남편이 지금 집에서 놀고 있는데, 좀 데려가서 일을 시켜라. 이래서 도교 도시바 이란 법인이 고민 끝에 니시다를 인턴으로 뽑습니다. 이때 나이가 29입니다. 일본에서 29의 인턴은 인생 궤도에서 그냥 탈락입니다. 근데 이란이니까 가능한 거죠. 근데 이제 니시다가 이란 도시바 법인에서 제일 처음 한 일이 커피를 타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근데 커피를 너무 잘 타서 나중에 굉장히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학생들한테 강의할 때 항상 뭐라도 하나만 잘하면 언젠가 누군가 알아본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만. 처음엔 커피 타는 일부터 시작해서 2년 만에 정직원이 됐습니다. 31살에 정직원 전환이 된 거죠. 그러고 나서 이 사람이 엄청난 수완을 발휘하게 됩니다. 미국으로 건너가서 PC 영업을 해서 판매왕이 됐습니다. 회사에서 눈여겨보게 됐죠. 이때 니시무로 하고 만납니다. 니시무로가 딱 보니까 비 도쿄대 출신에 같이 삼수했죠, 고생하면서 올라왔잖아요. 너무 예쁜 거죠. 그래서 후임 사장으로 지명했습니다. 니시무로-니시다가 이제 회장-사장의 구도가 됐습니다. 이 두 사람은 도시바의 먹거리, 미래 먹거리로 원자력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둘은 문과 출신이죠. 영업직입니다 둘 다. 그래서 원자력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기 때문에 원자력 전문가를 한 명 자기 팀에 넣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뽑게 된 게 사사키입니다. 사사키는 도쿄 대학을 나왔을까요, 안 나왔을까요? 이제는 도쿄 대학 나오면 사장 안 됩니다. 사사키도 와세다 출신입니다. 사사키를 후임 사장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에 간부들이 다 반대했습니다. 왜? 사사키는 폭언, 폭행, 갑질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부하 직원들을 아주 못살게 구는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인상은 되게 좋게 생겼죠? 근데 굉장히 평이 안 좋았습니다. 그런데 사사키가 아주 악행 중에 한 가지 유명한 악행이. 매주 일요일 날 회의를 했습니다. 매주 일요일 날 회의. 본인은 미혼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요일 날 회의를 해서 직원들의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근데 어찌 됐든 이 세 명이 도시바의 앞으로의 먹거리는 원자력이라고 생각하고, 미국의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결국 도시바가 웨스팅하우스 인수 때문에 망하거든요. 그 과정에서 세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일본에서는 이 사장들이 모이면 하는 얘기가 세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골프 얘기, 하나는 건강 얘기, 하나는 훈장 얘기입니다. 골프, 건강은 이해가 되시는데 훈장은 이해가 안 되시죠? 일본에서는 사장이나 회장을 하면, 기업의 사장이나 회장은 훈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단, 경단연이나 경제동호회, 상공회의소 회장을 한 번 해야 됩니다. 그래야 훈장을 받을 수 있는데. 니시무로가 훈장을 너무너무 받고 싶었는데, 경단연 부회장까지 하고 끝나서 훈장을 못 받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이 니시다와 사사키가 서로 사이가 틀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사키 성격이 굉장히 세잖아요. 부하들한테 갑질하고. 그래서 니시다가 그거 하지 마라고 얘기했다가 둘 사이에 굉장히 사이가 안 좋아져서, 회사가 둘로 쪼개졌습니다. 팀 니시다와 팀 사사키로. 그래서 이제 직원들한테 다 물어봅니다. 너 사사키 파야, 니시다 파야? 무슨 파야? 그래서 이제 회사가 완전히 둘로 쪼개진 상태에서, 사사키가 아베 정권 때 경제재정 위원회의 위원이 되면서, 자문위원회 위원이 되면서 경단연 부회장이 됐습니다. 이제 경단연 회장이 되면 그 훈장을 받는 거죠 사사키가 훈장을 받는 거는 너무 배가 아프잖아요. 그래서 니시다가 어떻게 했냐면, 사사키를 승진을 시켜 버립니다. 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왜 그러냐면, 규정이 있습니다. 규정이 뭐가 있냐면, 현직 그러니까 훈장을 받기 위해서는 현직 기업의 회장이나 사장일 것이에요. 부회장이 되면 훈장을 못 받습니다. 잔인하죠. 그래서 부회장으로 승진을 시킨 다음에 거기서 올리지도 내리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그래서 이제 완전히 틀어져 가지고 언론에 이제 서로 흉을 보기 시작합니다. 니시무로 타이조는 그걸 말리지 않고 경영에 더 깊숙이 관여합니다. 둘이 싸우게 놔두고 자기가 이제 실권을 장악하는 거죠. 고문인데. 그 상태에서 도시바가 이제 내분이 굉장히 심해졌죠. 심해지면서 나중에 이제 니시다와 사사키가 전쟁이 시작되니까, 니시다가 분식회계를 많이 했는데 그걸 이제 사사키가 알게 돼요. 내부 고발로 알게 됐는데. 그러면 이제 그걸로 이제 니시다를 고발을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사사키는 고발하지 않고 니시다가 굉장히 머리가 좋은데,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방법을 그대로 자기가 써서 분식을 더 확대합니다. 나중에 2015년에 내부 고발로 분식회계가 드러났을 때는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됐죠. 특히 사사키 같은 경우는 이 원자력에 대한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하면서 회사를, 그러니까 본인의 명예나 본인의 업적을 위해서 회사가 어찌 되든지 말든지 그렇게 이제 세 사람이 계속 싸우는 와중에, 결국에 2015년에 이 분식회계가 드러나면서 회사가 이제 어려움에 처했고요. 결국 2023년 12월에 상장 폐지가 됐습니다. 상장 폐지 되기 전에 니시무로와 니시다는 둘 다 사망했습니다. 이제 이게 사실은 쇼와뽀이 기업이라고, 쇼와라고 하는 연호를 씁니다만 고도 성장기 공식으로 성장한 일본 기업들의 대표적인 게 도시바이거든요. 이런 기업 내부의 사장과 회장들 간의 파벌 싸움, 월급제 내부 승진제 사장들의 한계죠. 이런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게 도시바입니다.

[4. 기업의 대분기 - 소니의 변신]

반면에 도시바와 비슷한 시기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반대로 환골탈태에 성공한 기업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기업이 소니입니다. 여러분들 소니를 뭐 만드는 회사로 기억을 하시나요? 제가 강연해 보면 연배가 좀 있으신 분들은 무조건 워크맨. 근데 한 4-50대 되신 분들은 바이오 노트북. 근데 이제 20대 분들은 좀 다릅니다. 여기 20대가 많으신 거 같은데. 소니 하면 뭐 생각나시나요? 플레이스테이션. 플레이스테이션입니다. 근데 지금 말씀드린 워크맨, 바이오노트북, 플레이스테이션은 전부 다 하드웨어죠. 소니는 지금 하드웨어 거의 만들지 않습니다. 소니의 영업이익 90%는 영화, 음악, 게임입니다. 지금 왼쪽에 있는 그래프 보시면 이게 좀 자세히 봐야 나오는데. 대부분이 뮤직, 픽처, 게임 서비스 이런 것들입니다. 90% 이상이 콘텐츠에서 나오고요. 이걸 2010년대에 완전히 개조했습니다. TV도 다 브라비아 TV 이런 거 다 팔아버리고요. 워크맨도 분리하고. 정말 소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전부 다 정리를 해 버렸습니다. 사실 이런 소니하고 비슷한 기업들도 있습니다. 히타치, 파나소닉 같은 기업도 그렇습니다. 히타치, 파나소닉이 8-90년대 엄청나게 잘 나가던 기업이죠. 2008-9년에 완전히 거의 파산 직전까지 갔습니다. 지금 히타치는 가전 이런 거 전기 제품, 전자 제품 하나도 안 만듭니다. 히타치가 하는 거는 솔루션 판매. 스마트 팩토리 만드는. 스마트 팩토리에 들어가는 솔루션 판매하는 기업입니다. 완전히 업태가 바뀌었죠.

[4. 기업의 대분기 - 일본 2.0과 일본 3.0 산업군 비교]

이렇게 해서 2010년대에 일본 기업들이 완전히 체질 개선을 한 기업들이 있습니다. 제가 1989년하고 2024년에 시가 총액 1위부터 10위까지 일본 기업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근데 차이점은 왼쪽은 전 세계 시가 총액입니다. 전 세계 시가 총액 1위부터 10위까지 일본 기업이 무려 일곱 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엄청났죠. 지금 시가총액, 일본의 시가총액 1위가 도요타 자동차인데. 도요타 자동차가 전 세계 시가총액 50위 안에 겨우 들 겁니다. 그만큼 일본의 경제력이 쪼그라든 건 맞습니다만, 내실을 보면 가운데 내용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생각을 하실 겁니다. 왼쪽에 잘 나갈 때는 대부분의 일본 기업들이 금융 회사이거나, 아니면 인프라 기업. 정부와 관련된 인프라 기업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른쪽 최근의 일본 기업들. 일본에서 잘 나가는 기업들은 대부분 제조업, 기술 기업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신에츠 화학이라든지, 다이킨 공업이라든지, 도쿄 일렉트론, 키엔스도 그렇고요. 반도체 또는 반도체 장비나, 디지털 정보 통신이나 이런. 물건을 만들긴 만드는데 B2B로. 경기도 잘 안 타면서 굉장히 기술력으로 승부하는 기업들이 상위권에 다 올라와 있습니다. 이게 일본이 양적으로는 쪼그라들었지만 사실은 질적으로는 반드시 쪼그라들었다고만 해석하기 어려운 그런 부분들이 있다. 이게 2010년대 일본 기업들의 변화다.

[4. 기업의 대분기 - 기업 지배구조 원년]

기업들의 변화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실은 큰 판 자체가 바뀌었습니다. 아까 제가 자본도 노동도 98년부터 2007년 사이에 10년 동안 많이 개혁이 됐다 그랬는데. 기업 구조 개혁은 예외였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기업 지배 구조 개혁이 언제 시작되냐면 2015년부터 시작이 됐습니다. 14년에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이 되고, 2015년에 거버넌스 코드가 도입되면서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도쿄 증권 거래소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도 2024년에 시작이 됐죠.

[4. 기업의 대분기 - 기업 지배구조 원년]

결국 최근 10년 동안 일본 주식 시장, 프라임 시장 기준으로 사외 이사 선임 비율이 100%로 오르고, 행동주의 펀드도 10배 이상 늘고. 결국에 80년 만에, 1930년대 이후에 80년 만에 일본의 주식 시장이 주주 중심주의, 자본 시장이 주주 중심주의로 바뀌어 가고 있다. 예전에 전쟁 전엔 주주 중심주의였는데, 전쟁하면서 주주의 권한이 굉장히 약해졌다가, 다시 주주의 권한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게 2010년대의 변화입니다. 이게 기업 경쟁력의 제고를 가져왔다고 보고요.

[5. 인구구조 변화 대응 - 저출산정책에서 연착륙정책으로]

일본의 합계 출산율이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죠. 원래 일본이 1920년대부터 인구 통계를 작성했습니다. 지금 100년 동안 통계를 작성했는데. 1920년대, 30년대에도 200만 명씩 태어났습니다. 100만 명으로 떨어졌을 때 일본이 굉장히 충격을 받고, 2016년에 100만 명 이하로 떨어졌을 때 신문 기사 이렇게 나왔습니다. 지금 이대로 가면, 2030년이 되면 80만 명 이하로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작년에 일본의 한해 출생아 수가 68만 명. 70만 명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예상한 거보다 훨씬 빠르게 떨어지고 있어서 굉장히 걱정을 많이 하고 있는데. 30년 동안 저출산 대책을 해왔습니다. 일본은. 1994년에 엔젤 플랜을 시작해서 2023년까지 30년 동안 5년씩 여섯 번 했는데 다 실패했습니다. 성공을 못 했습니다. 그걸 일본 정부도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하느냐? 저출산 고령화를 분리를 했습니다. 저출산과 고령화를 붙이면 이상하다는 거를 이제 깨달았죠. 왜? 고령화는 인구구조와 관련된 문제로, 연금이라든지 재정이라든지 이런 거하고 연계가 되죠. 그런데 이게 저출산 하고 붙으면 이상한 논리가 됩니다. 애들 좀 많이 낳으세요, 우리 연금 재정 위험하니까. 이상하잖아요. 애들 많이 낳으세요, 이거 정부 재정 문제도 있고. 누가 낳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일본은 저출산 문제 정책하고 고령화 정책은 완전히 분리를 한 상태입니다. 2023년 4월에 어린이 가정청이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여기는 저출산만 담당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저출산은 연금 구조 개혁이라든지 이런 거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냥 어린이, 아이들 복지 차원에서 접근하는 걸로 바꿨습니다. 포기라기보다 연착륙 정책이죠. 인구가 줄어드는 거는 기정사실이고, 줄어드는 인구 속에서 그 속도를 어떻게 늦출까를 고민하고 있는 게 지금 현실적인 일본이 취한 대안입니다. 그러면 인구를 그러니까 출산을 올릴 순 없어요. 이거는 불가능하다고 30년 동안 정책을 쓰면서 얻은 결론인데. 그러면 속도를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5. 인구구조 변화 대응 - 노동인구 확대]

한 가지는 비노동 인구를 노동 인구로 늘리는 겁니다. 사실은 전부 다 일하는 거 같지만, 일하지 않는 사람이 꽤 많죠. 전업주부, 고령자. 노동 시장으로 다시 불러들여온 겁니다. 그래서 일본의 비정규직 시장이 커졌습니다만, 일본 인구가 2009년부터 계속 감소하고 있습니다. 특히 2009년부터 감소하는데, 일하는 인구는 최근 10년 동안 500만 명 늘었습니다. 어떻게 늘었느냐? 전업주부들이 일할 수 있게 비정규직 시장 확대해서 전업주부들을 끌어들였고요. 지금 일본은 본인이 원하면 70대까지 일할 수 있습니다. 70살까지. 이렇게 해서 양쪽에서 비노동인구를 노동인구로 끌어들임으로 해서, 모두가 일하는 사회. 일본에서 1억 총 활약 사회. 1억 인구를 유지하면서 모두가 일하는 사회를 만들자고 하는 방향이 하나 있습니다.

[5. 인구구조 변화 대응 - 외국인노동인구 확대]

또 하나는 결국에 저출산 문제를 극복할 수 없으면, 더 낳지 못하면 외국에서 받아들이는 거밖에 없죠. 원래 일본은 화이트 컬러 노동 시장을 계속 확대해 왔습니다. 2012년부터 고도인재 포인트 제도라는 게 있어서, 지금 한국 사람들도 일본에 취업 많이 해 있죠. 일본 대학에 아무 대학이나 들어가셔서 학과를 보시면, 한국인은 꼭 한 명씩 있습니다. 한국인 교수들. 그 정도로 일본의 외국인 화이트 컬러 노동 시장이 굉장히 커졌습니다. 2018년부터는 블루 컬러 시장도 키우고 있습니다. 일본어 못 해도 정주를 위한 노동인구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특정 기능 1호, 2호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여러분 영어권 국가 가 보시면 택시 기사분들 중에 영어 잘하시는 분 잘 없잖아요. 자국민이 택시 모는 나라가 잘 없죠. 근데 일본하고 한국은 굉장히 자국민이 택시 기사도 하면서 서비스가 좋잖아요. 일본이 이 택시 시장을 열었습니다. 아직은 외국인 택시 기사가 없지만, 몇 년 안에 등장할 겁니다. 지금 일본은 외국인 노동자가 전체 취업자의 2.3%인데요. 지금 2040년까지 680만 명까지 늘릴 계획입니다. 엄청나게 빨아들이고 있고요. 최근에는 AI 관련한 인력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인도에서 대학원생들 1년에 3천만 원씩 주고 데려옵니다. 대학원생들을. 그래서 대학원생들에게 3천만 원을 주고 데려와서, 그들이 졸업을 하면 일본 기업에 취업해서 일본에 정주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가동을 했습니다. 결국에 아베노믹스는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통화 정책만 보면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구조 변화의 두 가지 큰 것. 한 가지는 기업 통치, 기업 지배 구조 개혁. 또 한 가지는 인구 구조 변화에 대응함으로써 잃어버린 30년이 아닌 잃어버린 20년에서 일본을 다른 스테이지로 지금 끌고 가고 있다고 하는 게 오늘 강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상 오늘 강연을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내용

제1000회 한은금요강좌

 ㅇ 일시 : 2025. 6.13(금), 14:00~16:00

 ㅇ 주제 : 장기 저성장 시대의 대응: 일본 사례를 통한 정책적 시사점

 ㅇ 강사 :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학과 이창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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