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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 오디세이 <29> 美 재무부-Fed 냉전의 어부지리

구분 화폐·금융
대상 일반인
경제교육기획팀 (02-759-5321) 2016.08.18 7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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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 
재무부 건물 한쪽에서 개최되었던 초기 연방준비위원회 회의 모습. 연준의 내부경영을 통할하는 총재(햄린, 맨 앞 오른쪽)가 있었지만, 의장은 재무장관(맥아두, 왼쪽)이 맡았다. 이런 구조는 1997년 이전의 한국 은행법에도 적용되었다. [사진 미국 연방준비제도]]



조직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돈줄과 목줄이다. 그래서 정부의 돈줄을 쥐고 있는 재무장관은 다른 장관들과 위상이 다르다. 영국 같은 내각책임제에서는 여당의 차기 총리 정도로 이해된다. 그런데 선진국에서는 각료가 아닌 중앙은행 총재의 위상이 재무장관 만큼이나 높다
.
중앙은행의 위상이 오늘날처럼 자리 잡게 된 데는 미국의 역할이 크다. 오늘날 미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독립성은 세계 최고 수준이며, 연준 의장은 흔히 ‘세계의 경제대통령’이라 불린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100년 전의 연준은 수많은 연방기구 중에서 형편없이 미약한 존재였다. 재무장관이 당연직 연준 의장이었으며, 연준 위원들은 법률에 따라 재무부 건물 안에서 근무했다(최초 연방준비제도법 제10조). 한마디로 말해서 연준은 재무부의 부속기구, 연준 위원은 재무부의 식객 정도로 취급받았다.

특히 연준 출범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맥아두는 현직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의 사위라서 연준의 목줄까지 쥐었다. 장인의 후광으로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을 꿈꿨던 맥아두는 연준 위원 뿐만 아니라 각 지역 연방준비은행의 총재와 임원까지 전부 ‘친맥(아두) 인사’들로 채웠다. 오늘날 12개 지역 연방준비은행의 위치도 대통령 후보로 두 번 나섰던 그가 정치적 계산에 따라 결정한 것이다.




[사진2 :
재무부-연준 간 화해협정 체결을 알리는 뉴욕타임스기사. 금리문제를 두고 1년간 실랑이 끝에 작성된 이 협정은 보통 ‘마그나카르타(권리대장전)’에 비유된다.]



대공황 계기로 독립성 확보한 Fed


첫 단추가 이렇게 채워지다 보니 책임감 있게 통화정책을 펴려는 전통과 문화가 연준 안에서는 없었다. 대공황이 닥쳤을 때도 재무장관의 지시를 기다리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결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집권한 뒤 연준의 지배구조에 칼을 댔다(1935년). 행정부 각료(재무장관·통화청장)들을 연준에서 배제하고, 금리 정책은 민간인 신분인 지역 연방준비은행 총재들이 참여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결정토록 했다. 제발 독립성을 갖고 정신 차리라는 뜻이었다.


새로운 법에 따라 임명된 마리너 에클스(Marriner Eccles) 신임 의장은 뉴딜 정책의 입안과 홍보에도 깊이 개입해 루스벨트의 신임이 대단했다. 그 신임을 바탕으로 에클스는 재무부 건물에서 빠져 나와 새 건물을 짓고 그 안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러면서 오늘날의 연준 모습이 갖춰지기 시작했다(오늘날 연준 본관 건물을 ‘에클스 빌딩’이라 부른다).


그러던 중 루스벨트가 사망하고, 트루먼 부통령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1945년 4월). 트루먼은, 노쇠한 루스벨트가 4선에 도전하면서 건강하다는 이유로 러닝메이트로 삼았던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트루먼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트루먼 자신도 대통령의 업무를 잘 몰랐다. 과감한 결정을 잘 내리는 주지사 출신 루스벨트와 달리, 판사 출신 트루먼은 결단이 느렸다.
 

인사 문제는 특히 서툴렀다. 전임 대통령이 임명했던 모건소 재무장관이 사임하자, 그 후임을 법조계에서 찾을 정도였다. 후임 빈슨 재무장관은 판사 출신이라서 에클스 연준 의장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이제 연준은 재무부보다도 더 강력해졌다.

하지만, 빈슨이 대법원장으로 영전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새로 임명된 존 스나이더(John Snyder) 재무장관은 제1차 세계대전 때 트루먼과 내무반 동료였다는 인연으로 발탁된 인물이었다. 대통령과의 인연을 주위에 하도 시끄럽게 떠벌린 탓에 임명될 때부터 “함량미달”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스나이더는 에클스를 협력자가 아닌 경쟁자로 여겼다.



[사진3 :
재무부-연준 간 화해협정 체결을 알리는 뉴욕타임스기사. 금리문제를 두고 1년간 실랑이 끝에 작성된 이 협정은 보통 ‘마그나카르타(권리대장전)’에 비유된다.]


 

루즈벨트 사후 스나이더 장관과 힘겨루기

대통령 취임 직후 트루먼이 에클스를 불러 연임을 약속했지만, 스나이더는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기준으로 새 경제팀을 짜야한다며 연준 의장 교체를 강권했다. 결국 트루먼은 에클스의 임기 마지막 날 “앞으로도 연준에 남아 신임 의장을 잘 보필하라”는 친서와 함께 그를 평위원으로 임명했다. 당사자에게 묻지도 않았던, 황당한 인사였다.


스나이더가 천거한 새 의장은 스카트(Scott)사의 맥케이브 사장이었다. 금융계 경험이 전혀 없는 일개 제지회사 사장을 연준 의장으로 천거한 이유는, 그래야 자기가 돋보이고 자기의 지시가 잘 먹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였다. 맥케이브는 부하 직원들의 싸늘한 반응 속에서 거기는 자기가 있을 곳이 아님을 직감했다. 여전히 금융계와 직원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지만 평위원으로 강등된 에클스를 예우하지 않으면, 조직을 통솔할 수 없었다. 결국 전임 의장인 에클스 위원에게 모든 일을 물어보며 결정했다.


스나이더 재무장관과는 시간이 흐를수록 멀어졌다. 금리문제 때문이었다. 당시 인플레이션 압력 때문에 모든 시장금리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스나이더는 제2차 세계대전 때처럼 단기국채 금리를 연 0.38% 수준에서 고정시킬 것을 지시했다(당시에는 페더럴펀드 금리가 아닌 국채금리가 목표였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재무장관을 돕는 것이 연준을 포함한 나머지 ‘하위’ 공직자가 할 일이라는 권위적인 설명과 함께.


결국 인위적 저금리 때문에 국채발행이 차질을 빚으면서 금융시장이 요동쳤다. 국고금 관리에도 비상이 걸렸다. 재무부는 그것이 연준의 미온적인 협조 때문이라고 비난하고, 연준은 그것이 장관의 비정상적인 지시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진상파악을 위해 열린 의회 청문회에서도 양 기관은 상대방 탓을 멈추지 않았다.
 

트루먼은 그런 소동이 짜증스러웠다. 국내에서는 고위 공무원의 수뢰사건이 터져 정권의 도덕성이 공격받고, 멀리 한국에서는 맥아더가 공개적으로 항명하여 대통령의 체면이 구겨지고 있던 때였다. 그런 가운데 의회가 밝힌 스나이더의 언행들은 명백한 연방준비제도법 위배였다. 판사 출신 트루먼은 이를 심각한 문제라고 여기고 스나이더에게 조속한 사태수습을 명령했다.


결국 스나이더는 연준을 찾아가서 7인의 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무부-연준 양해각서’에 서명했다(1951년 3월 4일). 앞으로는 연준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항복문서이자 반성문이었다. 양해각서가 체결된 뒤 트루먼은 그동안 물의와 조직 장악력을 문제 삼아 맥케이브 의장에게 사표를 요구했다. 지금까지 연준 역사에서 유일한 사임 압력이었다(얼마 후 에클스도 동반 사임했다).

 



시카고대 출신 젊은 석학을 한국으로


필리핀·실론(오늘날 스리랑카)·온두라스·과테말라 등 아시아와 중남미 신생국들이 중앙은행을 세울 때 연준은 직원을 파견하여 설립을 지원했다. 이미 중앙은행이 있었던 일본에는 일본은행 안에 ‘정책위원회’라는 의결기구를 두도록 가르쳤다(위원회가 생소했던 일본 정부는 일본 실정에 맞지 않는다며 강력히 거부하다가 1949년 6월에 이르러 받아들였다).


그러니 한국도 당연히 도와야 했다. 하지만 1949년 7월 중앙은행 설립을 도와달라는 김도연 재무장관의 편지가 도착했을 때 연준은 금리정책을 두고 재무부와 한창 전쟁 중이었다. 게다가 한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였다. 바로 코앞에 소련군이 주둔한 가운데 여수순천 사건(1948년 10월), 국회 프락치 사건(1949년 5월), 김구 피살(6월) 등 흉흉한 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행을 자원하는 직원이 나타나지 않았다.


맥케이브 의장은 편지를 받고 고민하다가 뉴욕연방준비은행(뉴욕연준)의 앨런 스프로울 총재에게 도움을 청했다. 뉴욕연준은 직원이 훨씬 많은데다가 스프로울 총재의 카리스마가 대단해서 직원을 설득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연준의 국제협력업무가 사상 처음으로 지역 연준에게 넘겨졌다.


의장의 요청을 받은 스프로울은 아서 블룸필드(Arthur I. Bloomfield) 국제수지과장을 불렀다. 블룸필드는 1941년 시카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면서 스프로울의 보좌관으로 채용됐던 인물이다. 오늘날 시카고 학파의 아버지 바이너 교수가 애제자로 여겼던 블룸필드는 금융이론과 금융제도 양면에서 내공이 탄탄할 뿐만 아니라 미혼이었다. 따라서 한국으로 파견하는 데 적격이었다.


블룸필드 자신은 험지로 가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으나 스프로울의 제안을 거절하지는 못했다. 자기와 같은 해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폴 사무엘슨(1970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조차 모교에서 채용이 거부되어 MIT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할 정도로 반(反)유태주의가 강할 무렵, 유태계인 자신을 채용하고 뉴욕연준 최초의 유태계 과장으로 승진시켜준 사람이 스프로울이었기 때문이다.


블룸필드는 은행감독국의 동료 존 젠센(John Jensen)과 함께 1949년 9월초 인천항에 도착했다. 가난이 줄줄 흐르는 현지 풍광을 본 두 사람의 입에서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순박했다. 특히 조선은행의 장기영 조사부장과 신병현 금융재정과장은 배움의 열망과 의욕이 두 눈에 가득했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2016.5.15일자 중앙SUNDAY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 차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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