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오디세이 <38> 美 특사와 온천서 알몸 협상, 9000만 달러 받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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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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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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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교육기획팀(02-759-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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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
1953년 11월 서울 창덕궁에서 한국을 방문한 닉슨 부통령(오른쪽)을 안내하는 백두진 국무총리. 제1공화국 유일한 경제통 총리였던 백두진의 중요한 임무는 미국 정부로부터 경제 및 군사원조를 많이 받아내는 것이었다. [사진 국가기록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92년 8월부터 11월까지 석 달간 쓴 첫 번째 항해일지에서 금(gold)이라는 단어를 75번이나 썼다. 십 년 뒤 네 번째 항해 중에 쓴 편지에서도 “금은 실로 놀라운 물건이다. 금만 있으면 무엇이든 지배할 수 있다. 금은 영혼을 천국으로 보낼 수도 있다”며 금 타령을 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도착했던 곳이 ‘황금의 나라’ 인도라고 믿었다. 황금에 눈이 어두워 자기가 도대체 무슨 일을 했는지 몰랐던 것이다.

 
한국전쟁 중의 백두진 재무장관도 이와 비슷했다. 그는 돈줄을 죄고 재정수입을 늘리는 데 골몰했다. 미국인들을 만날 때는 체면을 차리지 않고 “달러 좀 달라”고 호소했다. 유난히 돈을 밝힌 그의 정책을, 사람들은 ‘백(百) 재정’이라 불렀다. 긴축과 안정을 강조한 점에서 오늘날의 ‘초이(崔)노믹스’와는 반대였다.

 
백두진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공부하고 조선은행에서 잔뼈가 굵은, 전형적인 은행원이었다. 그러나 일하는 스타일은 은행원답지 않게 과감하고 저돌적이었다. 1951년 3월 한국식산은행 두취(오늘날 산업은행장)에서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분야별 안정 대책을 정해놓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취임 직후 한 일은 ‘조세범처벌법(5월)’을 만든 것이었다. 악질 탈세자는 체형도 불사한다는 이 법이 발표되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지 말라며 국회의원들이 벌떼처럼 반대했다. 요정에서 일하는 직업여성들까지 재무부로 몰려와 항의했다. 하지만 백두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원조는 원조고, 대출은 대출”]
‘임시토지수득세법(9월)’은 저항이 더 컸다. 농촌에서 거두는 세금을 현찰 대신 현물(쌀)로 받겠다는 이 법률은, 화폐경제를 물물교환경제로 되돌리는 특단의 조치였다. 매년 양곡수매 때문에 재정적자가 확대되고, 그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는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 차라리 쌀로 세금을 받아 양곡수매량 자체를 줄이는 것이 목표였다. 농민들은 “악성 인플레이션 속에서는 현물로 세금을 내는 농민들만 손해를 본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자 백두진은 “전쟁이라는 위기상황에서는 피해가 적은 농촌이 재정의 많은 부분을 감당해야 한다”고 맞받아치고 국회의원들을 하나하나 설득해 나갔다.

 
이어서 ‘귀속재산처리법(10월)’을 개정했다. 공개입찰에서 최고가를 제시한 사람에게 일제가 남긴 귀속재산을 매각한다는 그 법안은 연고자나 종업원 등 기득권자들의 반대가 워낙 컸다. 그래서 다소 후퇴했지만, 지지부진했던 매각작업에는 속도가 붙었다. 1962년까지 계속된 그 작업은 그가 재무장관일 때 최고조를 이루면서 재정수입이 크게 늘었다.

 
백두진은 미국에서 달러를 받아내는 일에도 악착같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한·미 정부는 유엔군 체류비용을 일단 한국은행이 대출키로 약속(‘유엔군 경비지출에 관한 협정’, 1950년 7월 28일)했는데, 그 규모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인플레이션의 주된 원인으로 손꼽힐 정도였다. 전임 최순주 장관이 조른 덕분에 1951년 10월 1215만 달러를 받아냈으나 이는 전체 대출금의 10% 정도에 불과했다. 백두진은 재무장관 취임 직후부터 일본의 유엔군 총사령부에게 상환을 독촉했다. 매튜 리지웨이 총사령관은 “외국 청년들이 한국까지 가서 피를 흘리는데 웬 돈타령이냐”고 일갈했다. 당시 민간 구호물자와 원조금이 한국은행의 대출금을 상회한다는 자료도 보여줬다. 그러자 백두진은 “원조는 원조고, 대출은 대출”이라며 응수했다.

 



[여대생까지 동원해 빚 독촉]
백두진의 지독한 성화에 시달리던 유엔군 총사령부는 넌더리를 내면서 백악관에 연락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석유회사 중역 출신의 클래런스 마이어를 대통령 특사로 임명하고 협상을 지시했다. 부산에 도착한 마이어 특사 일행은 첫 회담에서 “일단 3000만 달러만 갚고 나머지는 천천히”라고 운을 뗐다. 이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아주 노회한 사람이었다. 일단 ‘판을 깨라’는 지령과 함께 ‘살살 달래서 1억 달러까지 받아내라’는 지침을 동시에 보냈다.

 
백 장관은 마이어 일행을 이끌고 동래온천으로 갔다. 거기서 벌거벗고 다시 흥정해서 9000만 달러까지 끌어올렸다. 나머지는 대출의 당사자인 김유택 한국은행 총재의 몫이었다. 그는 기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부산 피난시절 시민들의 조세저항이 워낙 커서 재무부 사세국(오늘날의 국세청) 직원들이 세금을 걷기 위해 식당에 들어가면, 종업원들이 주방에서 펄펄 끓는 솥과 식칼을 들고 나와 위협하곤 했다. 그때 재무차관이었던 김유택은 직접 가게들을 찾아가 주방기기와 도구의 압류를 지휘했다. 재무차관의 그런 수고가 알려지자 조세범처벌법이 순순히 통과됐다.





[사진2 :

1952년도 한국은행 연차보고서. 연차보고서 중 유일하게 활자본이 아닌 등사본이다. 당시의 어려웠던 경제 사정과 내핍 생활을 보여준다. [사진 한국은행]]




미국과의 최종 협상을 앞두고 김 총재는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에게 연락해서 영문과 학생들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복을 입힌 뒤 부산 송도의 미진호텔 파티장으로 보내 미국 대표단의 시중을 들도록 했다. 기분이 좋아진 미국 측은 다음날 한국 정부에 700만 달러를 더 얹어 주었다. 그때서야 이승만 대통령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것이 ‘한·미경제조정협정(1952년 5월 24일)’이다. 보통 ‘마이어 협정’이라고 부르는데, 광복 이후 제1공화국이 붕괴될 때까지 미국과 체결한 15개 경제협정 중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다.

 
마이어 협정의 요지는, 오래 연체된 한은대출금 1억 달러를 즉각 상환하고 앞으로는 대출금을 제때 갚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미국 경제협력처(ECA)가 담당키로 했던 원조 사무는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중단됐다. 대신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이 자금을, 국제연합민간구호원조계획(CRIK)이 식료품·의류·의약품을, 미국의 대외활동본부(FOA)가 비료를, 보급품 원조프로그램(SEC)은 식량을 각각 지원했다.

 
제각기 진행되는 원조와 구호는 늘 부족하고 지체됐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무쵸 주한 미국대사,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콜터 UNKRA 단장, 워커 미8군 사령관 등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그때 한국은행 대출금 상환요구는 ‘구걸 외교’에 매달리던 한국이 미국에 큰소리 칠 수 있는 유일한 카드였다. 협정 체결의 일등공신 백두진은 2년 뒤 국무총리(최연소, 45세)로 영전했다. 김유택 한은 총재에게는 4년 뒤 연임이라는 보상이 따랐다.




[사진3 :

1952년 4월 부산 수영비행장에 도착한 마이어(오른쪽에서 다섯째) 미국 트루먼 대통령 특사 일행. 이들과 동행한 미 국무부, 국방부, 유엔군 총사령부 관계자들을 한국은행 임원 부인들이 영접했다. [사진 국가기록원]]




[원조가 제1공화국의 족쇄로 작용]
미국 입장에서도 마이어 협정은 중요했다. 미국은 이승만정부의 재정적자 누적과 저환율 정책을 보고 포퓰리즘을 걱정했다. 그러다가 안정과 긴축을 추구하는 ‘백(百) 재정’을 보고 안도하면서, 한은 차입금을 갚기로 했다. 하지만 견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협정문 제1조에 ‘한·미합동경제위원회(CEB)’ 설치를 못 박고 CEB를 통해 재정·금융·물가·임금 등 거시경제정책과 정책수단들을 일일이 통제한 것이다. 수출입과 외환정책에도 시시콜콜 개입했다. 제1공화국 내내 설탕·밀가루·방직 등 경공업만 육성되고 원조의존형 경제구조가 고착된 것도 CEB를 통해 미국이 그렇게 유도한 결과였다.

 
마이어 협정은 미국이 한국에 행사하는 포괄적 영향력의 원천이었다. 1961년 5월 19일 아침 김종필 중령의 예방을 받은 맥그루더 미8군 사령관이 당장 쿠데타를 중단하고 원대 복귀하라고 고함칠 때 그가 내세운 이유도 ‘마이어 협정 위반’이었다. 그 정도로 마이어 협정은 한국 사회 전반을 옥죄는 족쇄였다. 그렇다면, 그 협정의 체결을 위해 발벗고 뛴 백두진과 김유택은 황금에 눈이 어두워 자기가 도대체 무슨 일을 했는지 몰랐던 콜럼버스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70대의 대통령, 40대의 재무장관과 한은 총재, 그리고 20대의 여대생까지 총동원되어 그때 받아낸 돈은 전재(戰災) 복구와 산업부흥에 요긴하게 쓰였다. 그러면서 절대 빈곤을 탈출했다. 유엔에서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던 최빈국 한국은 이제 소말리아·앙골라·동티모르 등 분쟁지역에서 옛날의 자기 모습을 보며 남을 돕는 나라로 변모했다. 달러 한 푼을 더 받아내기 위해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떼를 쓰듯 발버둥 쳤던 눈물 나는 노력에서 시작된 기적이다. 마이어 협정 체결 직후 미국이 즉각 대출금을 갚은 것은 아니다. CEB를 통해 한 가지 조건을 내걸고 그것이 지켜질 때까지 또 뜸을 들였다. 그 조건은 화폐개혁이었다. 그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2017.1.27일자 중앙SUNDAY
한국은행 금융결제국장 차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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