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오디세이 <40> 마흔에 한국은행 2대 총재 된 김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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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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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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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

1952년 12월 4일 서울 근교에서 전투 중인 제3보병사단 15연대 사병들과 식사 중인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맨 왼쪽). 전쟁영웅이 연출한 이런 모습은 소련과 중공에게 큰 위협이었으며, 한국에게는 구원이었다. [사진 아이젠하워기념관] ]


 

해주지점서 소련군 위협받자 월남 미 군정청, 한국 재무부서 맹활약 구용서 사임으로 총재직 이어받아 지급준비제도 도입 등 업적 남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조 달러 이상을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할 계획이다. 그러려면 20조 달러 수준의 국가채무한도를 다시 늘려야 하는데, 쉽지 않을 전망이다. 오바마 대통령 때인 2013년에는 의회가 한도증액에 좀처럼 동의하지 않아서 연방정부가 일시적으로 폐쇄되기도 했다. 월급을 줄 수가 없어 공무원들의 출근이 중단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의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

빌 클린턴 행정부(1993~2001) 때는 그런 일이 두 차례나 있었다. 이른바 르윈스키 스캔들은 1995년 말 연방정부 폐쇄로 정규직 공무원들이 출근을 안 할 때 무급 인턴직원인 여대생과 대통령이 집무실 안에서 저지른 일이다. 대통령의 사적인 일이 공적인 공간에서 진행됐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공적인 업무가 사적인 공간에서 진행된 한국의 세월호 사고 때와는 정반대였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국가채무한도가 따로 없다. 매년 예산을 심의하는 일이 곧 국가채무한도를 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에만 국가채무한도가 있는 것은 전쟁 때문이다. 의회가 재정적자 확대를 이유로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거부감을 보이자 1917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의회를 달래려고 전비조달용 채무상한선을 느슨하게(50억 달러) 정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그 규모는 450억 달러로 대폭 늘어나고, 1945년에는 3000억 달러까지 확대됐다.
 
미국 시민들과 의회는 그런 상황이 불편하고 불안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자마자 국가채무한도를 줄이면서 고강도 재정긴축을 요구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또 터졌다. 민주당 행정부는 국가채무한도 재인상이 불가피해졌다고 주장하고, 야당인 공화당은 턱도 없는 소리라고 반발했다. 미국 최초의 국가채무한도 논쟁이었다. 결국 한국 원조비용은 세금만으로 조달되고, 미국이 한국은행에 갚기로 했던 유엔군 차입금 1억 달러는 2년이 넘도록 상환이 연기됐다.



황해도 인맥, 해방 후 남한에 뿌리 내려

그런데 1952년 말 치러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공화당 후보로 나서 당선됐다. 전쟁영웅인 아이젠하워는 공산주의와 힘들게 싸우고 있는 혈맹국을 응원하기 위해 취임하기도 전에 한국을 찾았다. 백두진 국무총리는 미국 대통령당선인을 영접하는 자리에서 전쟁피해를 화제로 꺼냈다. “생활터전을 잃은 사람이 2000만 명이고, 파괴된 가옥이 60만 호, 기타 물질적 손해가 최소 50억 달러”라며 한국은행을 통해 입수한 숫자들을 줄줄 읊었다. 그리고 최강국 미국이 최빈국 한국에 빚진 돈은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호소했다.
 
아이젠하워가 다녀간 지 두 달 뒤 화폐개혁이 단행됐다. 한국인들의 눈물겨운 재활의지에 감동한 아이젠하워는 한국은행 대출금을 즉각 상환했다(지난 호 참조). 4월에는 헨리 타스카 박사를 대표로 대통령 경제특별사절단을 파견했다. 조사를 마치고 돌아간 타스카는 휴전협정 체결 직후 “3년 간 11억 달러를 원조한다”는 ‘한국 재건원조 특별보고서’를 공개했다. 한국에 대한 심폐소생술을 마치고 재활치료를 시작한다는 선언이었다. 20년 만에 여당이 된 공화당은, 야당 시절과는 딴판으로 한국 원조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런 일을 성사시킨 백두진 재무장관은 이승만 대통령과 고향이 같았다. 그래서 이 대통령은 그를 유난히 좋아했다. 정치적 라이벌 수준까지 성장한 이범석 국방장관을 낙마시킬 때도 이범석 계파(족청계)의 백두진은 예외로 했다. 오히려 국무총리로 승진시켰다.
 
백두진의 고향 황해도는 20세기 초 인재들의 보고였다. 기독교 문물을 일찍 접한 데다가 물자가 풍부해 전반적인 교육열과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안중근·이승만·김구 등이 그런 예였다. 해방 직후 소련군이 악행을 거듭하자 그들은 남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각 분야에서 두각을 발휘했다. 군에는 채명신(훗날 주월 총사령관)·오치성(내무장관)·김형욱(중앙정보부장), 행정부에는 홍성철(통일원장관)·장예준(상공장관)·오원철(경제수석), 학계에는 최재서(영문학)·양주동(국문학)·정원식(교육학, 국무총리), 법조계에는 김세완(감사원장)·김두일(대법관)·이회창(감사원장, 국무총리) 등이 그런 경우였다.




[사진2 :
부산 피난생활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복귀하는 한국은행 직원들. 짐 꾸러미 속에서 꾀죄죄한 복장을 하고 있으나 표정들이 아주 밝다.]




[사진3 :
1952년 3월 5일 법무장관이 재무장관에게 보낸 한국은행법 해석 결과. 이 공문이 한국은행에 전해지면서 총재의 임기를 둘러싼 잡음이 사라졌다. [사진 한국은행] ]



한은에도 김유택·김성환·신병현 등 포진

백두진을 배출한 한국은행에도 황해도 출신들이 주류를 이뤘다. 김유택(훗날 총재)·김성환(총재)·신병현(총재, 부총리) 등이 그런 예였다. 해방 당시 조선은행 해주지점 지배인이었던 김유택은 남으로 올 생각이 없었다. 고향 황해도에서 근무하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 소련군 사병이 한밤중에 집을 찾아와 머리에 권총을 겨누며 은행 금고문을 열라고 협박했다. 김유택은 금고 안의 현금을 내어 주면서도 침착하게 영수증을 받아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소련군 사령부를 찾아갔다. 소련군 사령관은 점잔을 빼면서 발뺌을 했지만, 소련말로 쓰인 영수증을 들이밀자 마지못해 강탈한 현금을 돌려줬다.
 
순발력과 배짱으로 돈은 되찾았지만, 김유택은 북조선에 환멸을 느꼈다. 아내와 다섯 살 난 아들 철수(훗날 상공장관)에게는 재회를 약속하고 단신으로 본점으로 내려와 백두진 업무부장을 찾았다. 그의 야무진 일처리 실력은 금융계에 금방 알려졌다. 미 군정청의 찰스 고든 재무국장은 그를 상호은행(훗날 한일은행에 합병)의 상무로 임명하고 부실채권과 유휴인력 정리를 부탁했으며, 김도연 재무장관은 그를 이재국장으로 불러 중앙은행 설립을 맡겼다. 김유택은 낯선 직장에서 어려운 일들을 척척 해결했지만, 상호은행과 재무부 직원들은 외부인의 맹활약이 아주 못마땅했다.
 
김유택 자신은 중앙은행 이외의 자리에 한눈을 팔지 않았다. 그래서 상호은행 상무건, 재무부 이재국장이건 항상 파견 형식으로 근무했다. 심지어 재무부 차관 시절에도 한국은행 부총재직을 겸임했다. 그리고 1951년 9월 한국은행 수석부총재로 복귀했다.
 
그런데 석 달 뒤 구용서 총재가 사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백두진 장관은 대통령에게 김유택을 후임 총재로 추천했지만, 정작 김유택은 고속승진이 달갑지 않았다. 몇 번을 고사하다가 떨떠름하게 2대 총재로 취임했다. 그러나 막상 취임해서는 매섭게 일에 매달렸다. 당시 한국은행은 5000만 원을 초과하는 일반은행의 거액대출실적을 일일이 보고받으면서도 지급준비제도는 사실상 포기하고 있었다. 김유택은 거액대출실적 보고의무를 전격 폐지(1952년 1월)하는 대신, 지급준비제도의 스위치를 켰다(4월). 그것이 물가관리에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총재 임기 4년 보장이 중도 경질 불러 

하지만 마흔 살에 불과한 총재를 두고 내부에서는 “구용서 총재를 밀어낸 하극상”이라는 말이 들렸다. “얼마 못 갈 것”이라는 쑥덕임도 있었다. 당시 총재의 임기가 다소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임기 3년)이 중도 사임하는 경우에는 후임자가 전임자의 잔여임기만 근무한다. 대통령이 함부로 경질을 시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당연직 금통위원인 신임 총재도 전임자의 잔여임기 2년 반만 채운다는 말이 퍼졌다.
 
그것은, 주로 조선식산은행 출신 외국부 직원들의 바람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맏형 격인 김진형(훗날 제3대 총재) 부총재를 제치고 여섯 살이나 어린 김유택이 총재가 된 것이 못마땅했다. 연방정부 폐쇄사태를 맞은 미국 대통령처럼, 외국부 직원들의 입방아 폭풍을 맞은 김유택도 운신의 폭이 넓지 않았다. 그러자 김유택을 천거한 백두진이 나섰다. 법무장관에게 요구해서 “다른 금통위원들과 달리 총재는 새로 4년의 임기가 시작된다”는 유권해석을 받아 한국은행에 전달했다. 그때서야 총재 임기를 둘러싼 잡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취임 석 달 만이었다.


하지만 길게 보면, 결과가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 금통위원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3년 2개월이었다. 총재는 한은법상 그들보다 임기가 1년 더 길었지만, 평균 재임기간은 오히려 2년 3개월에 불과했다. 외국의 중앙은행 총재나 금통위원들과 달리 한은 총재는 중도교체의 방어막이 없었던 탓이다. 김유택 자신도 훗날 중도에 경질되었다. 참고로 한국방송공사(KBS) 사장은 후임자가 전임자의 잔여임기만 채우도록 하여 대통령의 중도교체 욕구를 줄인다(방송법 제50조 제6호).

그런데 휴전협정 이후 재무장관부터 교체됐다. 새로 취임한 박희현 재무장관은 조선총독부 내무과장 출신의 행정 관료이었다. 그는 조선은행 출신인 김유택이 재무차관에 임명될 때 뒤에서 불평하던 재무부 직원 중 하나(회계국장)였다. 그러나 김유택이 일하기는 더 쉬워졌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2017.3.26일자 중앙SUNDAY
한국은행 금융결제국장 차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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