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오디세이 <42> 뚝심으로 이뤄낸 국제 금융기구 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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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금융
등록일
2017.06.05
조회수
7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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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경제교육기획팀(02-759-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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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

1953년 12월 1일 한국은행 뉴욕사무소 개소식. 민간 부문 최초의 탈(脫)아시아 사무소였다. 유창순 사무소장(왼쪽에서 둘째), 아메리칸대학교 연수생 신병현(훗날 총재, 가운데 뒤), 뉴욕 연준 연수생 김정렴(훗날 재무장관, 맨 왼쪽) 등이 참석해 축하했다. [사진 한국은행] ]



 

IMF 지분 1250만 달러 마련하려 부족한 금 600㎏ 시중에서 사들여, 항공·숙박 보조받아 55년 총회 참석... 이제는 16개국 대표하는 큰손으로

사람에게 초혼과 재혼을 구분하는 것처럼, 수도는 전도(奠都)와 천도(遷都)를 구분한다. 전도는 나라를 세울 때 정하는 것이고, 천도는 그 이후 옮기는 것이다. 가톨릭 신도에게 초혼만 허락되고 재혼은 허락되지 않듯이, 대한민국에서 전도는 쉽지만 천도는 어렵다. 서울이 수도인 것은 불문헌법이기 때문이다(2004년 10월 헌법재판소 결정).

그런데 요즘 한국은행은 마치 천도라도 하는 양 분주하다. 건물 보수와 신축을 위해서 본부 전체가 인근의 다른 건물로 이사 중이다. 총재실까지 옮기는 것은 정확히 60년 만이다.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한국은행 본부가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으나 건물이 심하게 폭격을 받아 입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맞은편 저축은행(현재 SC제일은행 제일지점) 건물에 머물러 있다가 1957년 말 본부 전체가 원래의 자리로 이동했다.
 
부산 피난지에서 임명된 김유택 총재는 결국 자기가 하루도 근무하지 않을 건물을 고치느라 노심초사했다. 그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고치거나 만드느라 늘 바빴다. 전쟁 직후 외환업무와 국고업무가 폭증하자 외환관리부와 국고대리점 제도를 만들고, 경제부흥에 필요한 내자 동원을 위해서 업무부에 저축과(필자가 담당하는 금융결제국의 뿌리다)를 신설했다. 국내 최초로 해외연수제도도 만들었다(얼마 뒤 그것을 보고 공무원 해외연수제도가 생겼다). 그는 조선은행·해주금융조합·상호은행·재무부 등 여러 기관을 경험한 조직관리의 달인이라서 그런 일에 적임자였다.
 
그의 관심사는 나라 밖까지 이어졌다. 장차 일본과 국교회복 협상이 개시될 것에 대비하여 청산계정을 설치하고 대일 배상청구권을 계산했다(한국이 요구하는 배상청구액의 상당 부분은 구 조선은행의 채권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김유택은 훗날 주일대표부 대표가 되어 일본정부와 청구액을 협상했다). 1953년 2월에는 홍콩지점을, 12월에는 뉴욕사무소를 개설했다.
 
그 무렵 미국은 ‘마이어협정’에 따라 한국은행 차입금을 1953년 3월 16일 모두 갚았다. 8580만 달러가 한꺼번에 상환되자 김유택은 다음 계획을 궁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 서독과 일본이 1952년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훗날 세계은행)에 가입했으니, 한국이 그 뒤를 잇는 것이다. 그래야 저금리 개발원조자금을 받고 외국 상업차관의 길도 뚫린다. 뉴욕사무소 개설은 국제기구 가입을 위한 교두보였다.
 
김유택도 직접 뛰었다. 워싱턴DC를 찾아가 긍정적인 답을 얻고는, 1954년 2월 13일 가입신청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정부의 생각은 달랐다. 외환보유액을 국제기구 출자금 따위에 쓰는 것은 사치며, 그 돈으로 도로를 닦고 공장을 짓는 일이 훨씬 급하다고 봤다. 김유택이 작성한 가입신청서는 재무부에서 잠들었다.
 


체코 빈자리 파고들어 54년 IMF 가입


[사진 2 :

1 1955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개최된 IMF·IBRD 연차총회 당시 김유택(왼쪽) 총재 일행. 한국 가입안이 통과된 이 회의에 신병현 조사부장(가운데), 이치영 재무부 이재국장(오른쪽)을 대동한 것은 정부가 한국은행에서 차입한 국제기구 출자금을 빨리 갚으라는 압력을 넣기 위해서였다. 2 뉴욕 연준에 보관된 공문. IMF 가입을 위해 한국은행 소유 금괴 87개를 IMF 명의로 대체한다는 내용(1955년 8월 12일). [사진 한국은행]]
 


김유택은 변영태 외무장관에게 도움을 청했다. 부산 피난시절 한국은행에서 가계대출을 받은 적이 있는 변영태는 김유택의 계획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까지 받아 줬다. 김유택은 가입신청서를 양유찬 주미대사에게 전달했다. 양유찬은 일제강점기에 하와이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다가 이승만 부부를 알게 돼서 해방 후 우연히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된 사람이다. 어쩌다 공무원이 된 양유찬은 재무장관이 아닌 한은 총재의 말만 듣고 덜컥 가입신청서를 접수시켰다(4월 16일).
 
다음 절차는 미국·영국·프랑스·브라질·호주로 구성된 가입심사위원회가 한국의 출자지분(쿼터)을 정하는 일이었다. 출자지분을 계산하려면 국민소득·수출입액·무역외수지·재정수지 등의 정교한 통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은 그런 통계를 만들 능력이 없었다. 김유택은 부랴부랴 김정렴 과장(훗날 재무장관)을 연수생 신분으로 IMF 본부에 ‘위장’ 파견했다.



태국 도움으로 국제 무대에 데뷔

김정렴은 미국 의회도서관을 뒤져서 식민시대의 조선 경제에 관한 일본 고서적과 경제연보들을 찾았다. 그 자료들을 토대로 몇 가지 가정을 더한 뒤 출자지분의 산출근거들을 만들어 냈다. 통계라기보다는 창작 소설에 가까웠지만, IMF 조사부 직원들은 김정렴의 촘촘한 논리와 순발력에 혀를 내둘렀다. 김정렴의 개인기에 힘입어 IMF와 IBRD 대한한국의 출자금이 각 1250만 달러로 정해졌다. 출자금이 한 달 만에 확정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1954년 연차총회는 역사적이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자유중국(대만)이 행사했던 투표권이 중공으로 넘어갔다. 반대로 회원국 중 유일한 공산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는 1944년 가입협정문에 서명한 뒤 10년 동안 출자금을 납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축출됐다. 그 빈자리를 한국이 파고든다는 것이 김유택의 계획이었다.
 
김유택은 국제기구 가입에 무관심한 재무장관 대신 옵저버 자격으로 연차총회장을 향했다. 그때 프라야드 부라나시리를 대동했다. 프라야드는 1948년부터 3년 간 유엔한국재건위원단(UNKRA)에서 일하다가 돌아간 태국 재무부 국장인데, 김유택은 그를 총재고문으로 위촉하고 한국 홍보를 맡겼다. 아시아의 최대 쌀 수출국인 태국이 한국보다 국제사회에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을 감안한 것이었다.
 
프라야드의 열띤 홍보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홍보하는 파티는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손님을 기다리던 김유택은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이 예고 없이 방문하자 더 없이 반갑고 고마웠다.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는 자신의 부하이자 외아들이 한국에서 전투 중 실종되었을 때 시신수색을 중단시킨 사람이다. 오로지 한국전의 승리를 위해 사사로운 감정을 희생한 것이다. 태극기가 걸린 텅 빈 파티장에서 두 사람은 만감이 교차하여 손을 잡고 울었다.
 
다행히도 1년 내 출자금을 완납한다는 조건으로 한국 가입안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결과를 들은 이중재 재무장관은 “예산이 없으니 한국은행이 알아서 하라”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은행은 출자금의 대부분을 정부대출금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IMF 출자금 1250만 달러 중 25%는 반드시 금으로 납입해야 했는데, 뉴욕 연준에 맡긴 것과 지하금고에 갖고 있는 것을 모두 합해도 642㎏(72만2000달러어치)이 부족했다.  
 
결국 금융통화위원회는 한은법 제79조를 근거로 한국은행이 시중에서 금을 사서 정부에 대출하도록 의결했다(1955년 8월 8일). 그러나 제79조는 한국은행이 정부의 국고사무를 보좌하라는 것이지, 금을 사서 정부에 빌려주라는 것은 아니었다.



반세기 만에 최빈국서 대출해 주는 나라로  

한은법을 무리하게 해석해 가며 출자를 마친 김유택은 뿌듯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10년간 못한 일을, 경제력이 그 10분의 1에 불과한 한국이 1년 만에 완수한 것이다. 하지만 1955년 9월 터키 이스탄불 연차총회에 참석할 때 정부는 “또 돈을 쓴다”는 투로 곱지 않게 봤다. 김유택은 “새 회원국 대표단의 항공료와 숙박비는 주최 측이 제공한다”는 안내서를 보여 주고 겨우 허락을 받았다. 어렵게 총회에 참석한 김유택은 인사말을 통해 “한국은 전쟁의 참상을 딛고 언젠가 반드시 일어설 것”이라고 사자후를 토했다. 아프가니스탄과 함께 가입하는 지분율 0.14%의 작고 가난한 나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연설은 허풍이 아닌 예고였다. 애초에 한국의 IMF와 IBRD 가입목적은 원조자금을 받는 것이었지만, 지금 한국은 IMF에 대출해 주는 나라에 속한다. 김유택이 고독하게 연설하던 터키 이스탄불에서 2009년 다시 연차총회가 열렸을 때 윤증현 기재부장관은 “한국의 지분이 너무 작다”고 호통쳤다. 그래서 지금은 가입을 심사했던 호주보다도 더 많은 지분을 갖고 16개국을 대변한다. 자신을 대변해 줄 나라가 없어서 벨기에(1956년)·중공(1966년)·인도네시아(1972년)·호주(1978년) 그룹을 전전했던 최빈국의 기적 같은 변신이다(반공국가 한국이 한때 전쟁 상대였던 중공에 의탁한 것은 슬픈 코미디였다). 그것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성경 구절 그대로다.
 
IMF와 IBRD는 대한민국 정부가 최초로 가입한 국제기구다. 가입 교섭, 쿼터 계산, 출자의 모든 과정을 도맡았던 한국은행이 일등공신이지만 김유택은 자랑하지 않았다. 귀국하는 프라야드가 대통령 표창장이라도 받도록 경무대에 부탁한 것이 전부였다. 한편, 김유택이 국제기구 가입을 궁리할 때 재무부는 다른 일을 궁리했다. 한은법을 고쳐서 은행감독업무를 도로 가져가는 것이다. 그것은 중앙은행 기능의 천도였다. 뒤통수를 맞은 김유택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2017.05.21일자 중앙SUNDAY
한국은행 금융결제국장 차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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