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1:
1949년 5월 조선은행 대전지점을 방문한 최순주 총재(가운데 흰 의자에 앉은 이. 총재의 왼쪽은 장기영 조사담당 이사). 뒤편 건물벽에는 일제 때 것을 살짝 고쳐 만든 해방 직후 조선은행 마크가 보인다. 자신들의 신분을 일제 때의 연장선에서 보려는 조선은행 직원들의 의식이 드러난다. [사진 한은동우회 정지현(1928년생) 회원]]
근대 은행업은 극심한 정치적 혼돈 속에서 태동했다. 14세기 후반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북쪽의 신성로마제국과 남쪽의 교황령(Papal State)이 고대 로마제국의 적통임을 내세우면서 서로 패권을 다투었고, 20개가 넘는 군소 도시국가들은 그 사이에서 합종연횡을 일삼으며 끊임없이 으르렁거렸다. 도시국가의 군주들은 쿠데타를 통해 찬탈한 통치권이나 용병대장을 동원해서 빼앗은 이웃의 영토를 인정받는 대가로 황제나 교황에게 돈뭉치를 넘겼고, 은행업자들은 그것을 준비하고, 운반하고, 보관했다. 메디치 가문이 로마·나폴리·베네치아·피사 등으로 지점망을 확장시킨 것은 그런 일들의 부산물이었다.
메디치의 성공비결은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 메디치 은행은 서로마제국 교회(바티칸)의 금고지기이자 동로마제국 교회(동방정교)의 친구였다. 악명 높은 깡패 용병대장 스포르짜의 자금줄인 동시에 르네상스 움직임을 주도하는 인문학자들의 고상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한 은행의 접점이 그토록 넓었던 것은 600년 뒤 조선은행과 비슷했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선언과 함께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신기루는 사라졌다. 일본의 영토는 4개 섬과 자잘한 몇 개 주변 섬으로 제한됐으며, 조선은행도 한반도와 중국 관동주, 내륙 등으로 퍼져있던 37개 점포망이 전부 폐쇄되고 도쿄 본부만 남게됐다. 그 순간 조선은행의 일본인 간부들은 미친 듯이 돈을 찍어 뿌렸다. 패망한 일본군과 일본 민간인들을 무사히 귀환시키기 위해서는 조선은행권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조선총독부는 조선 밖에서 조선은행권의 유통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1943년부터 중국 내 일본 점령지와 만주국에서는 조선은행권이 널리 유통됐다(2015년 11월 15일자 제 21화 참조). 일본이 세운 신생 괴뢰정부의 화폐보다는 조선은행권이 그나마 신뢰할만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륙을 빠져나오는 일본인들에게는 일본은행권보다 조선은행권이 더 도움이 됐다.

[사진2: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이 점령지에서 사용한 1달러짜리 군표. 맥아더가 지휘하는 일본에서는 사용되었으나 하지 중장이 주둔한 남조선에서는 사용계획이 취소되었다. 훗날 이 군표를 몰래 매입하여 사용하다가 초대 한국은행 총재 구용서와 장기영 이사가 사임하게 된다.]
새 화폐 옮기던 구용서 미군 장교 만나
조선은행 경성본부는 급한 나머지 모조지에다가 일반 인쇄기로 조악한 지폐를 찍기 시작했다(2014년 10월 12일자 제2화 참조). 도쿄에서 이런 보고를 받은 다나카 데쓰사부로(田中?三?) 총재는 구용서 대리를 불렀다. 오사카 서구 출장소에서 해방을 맞아 서울로 돌아가려던 구용서는 도쿄 본부에 귀국인사 차 방문했다가 총재로부터 뜻하지 않은 임무를 부여받았다. 대장성 조폐국에서 인쇄한 조선은행권 3억 원을 경성으로 급히 공수하라는 것이었다. 8월 14일 현재 남조선 화폐발행액의 15%가 넘는 거액이었다.
상명하복이 몸에 밴 구용서는 그 지시를 즉각 받아들였다. 하지만, 화폐를 실은 경비행기는 심한 바람 때문에 부산 비행장에 내릴 수 없었다. 울산 비행장도 활주로에 드럼통들이 잔뜩 쌓여 있어 포기했다. 8월 초 일본에 선전포고한 소련의 비행기가 착륙하지 못하게 하려는 방해물이었다. 구용서는 내릴 곳을 찾지 못해 대한해협을 몇 번씩 오락가락하다가 결국 9월 8일이 돼서야 울산에 착륙했다. 이튿날 부산발 열차편으로 가까스로 경성에 도착했다.
마침 그날, 미군도 서울에 입성했다. 며칠 씻지도 못해 꾀죄죄한 몰골의 구용서는 서울역에서 조우한 미군 장교에게 천신만고의 과정을 설명하며 새 돈 3억원을 전달했다. 이 정도 금액이면 새 돈을 찍기 위해 수고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과 함께. 미군 태평양사령부는 조선의 화폐 제도나 실상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미 군표를 법정화폐로 쓸 생각이었다(포고령 제3호, 9월 7일). 그런데 현지에 도착해 구용서로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고 조선은행의 금고를 확인해 보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군표 발행계획을 취소했다(9월 16일). 그것은 발권기관으로서 조선은행의 특권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인들의 탈출을 도우려는 총재의 지시를 수행하던 구용서가 미군에게서 우연히 얻어낸 결과였다.

[사진3:
벚꽃을 형상화한 일제 때 조선은행 마크.]
최순주, 이승만-조선은행 연결 고리로
그러나 미군과 조선은행의 사이가 아주 좋았던 것은 아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즉각적인 반발사태가 벌어졌다. 이튿날 금융기관들은 반탁 공동결의문을 발표했다. 그 결의문은, 금융계에서 문장력이 좋다고 소문난 조선은행 조사부 장기영 차장이 작성했다. 하지만 반탁운동은 미 군정청의 방침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12월 30일은 일요일이었으나 군정청의 고든 재무국장은 구용서를 아침 일찍 저축은행(오늘날 신세계백화점 옆 제일은행 제일지점)의 자기 사무실로 불러 노발대발 화를 냈다. 오후에 다시 불러 “당신들은 해고야”라며 엄포를 놨다.
고든은 그날 오후 늦게 조선은행 임원 인사를 단행했다. 구용서와 백두진은 이사로 남겼으나, 자신의 보좌관인 스트링거 대위를 포함해 외부출신 5인을 신임 이사로 임명했다. 한마디로 조선은행 임직원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외부인사 중에는 나중에 학력위조와 전과가 밝혀져 파면되는 사람도 있었다. 그만큼 졸속이었다.
급하게 투입된 인사 중 연희전문학교 경제학과 교수 출신인 최순주(훗날 재무장관, 국회 부의장)는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추천한 인물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반탁운동을 주도하는 이승만 계열에 속했다. 그의 부인이 이승만 박사의 하와이 망명시절 이웃에서 말벗을 하며 수양딸 노릇을 했다. 최순주는 덩달아 사위 대접을 받고 있었다. 금융계 경험이 전혀 없던 최순주는 그때부터 조선은행과 미 군정청, 그리고 이승만 박사를 잇는 ‘키맨(key man)’이 됐다.
최순주가 투입되기 전까지 조선은행은 김구 계열과 가까웠다. 이승만 박사보다 한 달 여 늦게 1945년 11월 23일 환국한 김구 일행은 미 군정청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상해 임시정부에서 재정부장을 맡았던 조완구(趙琬九)는 구용서를 불러 부탁했다. 중국을 떠날 때 장제스(蔣介石)한테 받은 전별금 중 6000달러가 남았는데, 이를 비밀리에 환전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미군정 법령에는 위반되는 그 부탁을, 구용서와 백두진은 소문나지 않게 조용히 처리했다. 얼마 뒤 김구는 경교장(京橋莊)으로 그들을 불러 고마움을 전했다.
이범석 ‘족청’, 여운영 ‘건준’ 모두와 협력
조선은행은 중국에서 광복군을 이끌던 이범석(李範奭) 장군과도 가까웠다. 1946년 6월 고국으로 돌아온 이범석은 청년들을 조직화하고 훈련한다는 명분으로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조직했다. 미 군정청은 이 조직이야말로 좌익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풀뿌리 조직이라 판단하고 조선은행에게 대출을 요구했다. 이번에는 조선은행이 군정청 지시를 군말 없이 따랐다.
도무지 담보로 잡을 것이 아무 것도 없던 이 조직에 대해 조선은행 간부들은 대출을 주저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백두진이 족청의 재정담당 이사로, 유창순이 회계 감사로 파견되어 신설 조직의 안살림을 보살폈다. 분명 금융기관의 정도(正道)라고는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후 이범석·백두진·유창순은 모두 국무총리가 됐다.
한편,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이끌던 김성수(金性洙)는 특이한 목적으로 조선은행에 접근했다. 미·소(美·蘇) 분할통치를 대신해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정부수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외국에 호소하는 영문책자를 제작하려는데, 변변한 인쇄시설을 찾기 어려워 조선은행에 부탁한 것이다. 조선은행이 은밀히 제작한 그 인쇄물은 1948년 초 유엔 한국임시위원회에 전달되어 그해 3월 12일 총선거를 승인하는 데 기초자료로 쓰였다. 그 승인을 토대로 5월 10일 선거가 치러지고 7월 17일 헌법이 제정됐다.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조선은행 임원진을 경무대로 불러 치하했다. 그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눈에 든 백두진은 몇 년 뒤 외자청장·재무장관·국무총리로 계속 뻗어나갔다.
돌이켜 보면 해방 직후부터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이를 때까지 조선은행은 자의반 타의 반으로 정치권과 자주 접촉했다. 그런 모습은 14세기 후반 메디치 은행과 비슷했다. 조선은행은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부탁에 응한 적도 있다. 정치세력들이 끊임없이 이합집산하는 가운데에서 정치인들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조선은행에 접근했고, 조선은행은 이들의 은밀한 요구를 적당히 들어주면서 등거리 외교를 했다. 그러면서 무의식 중에 ‘새 나라에 없어서는 안 될 기관’이라는 인식을 심었다.
한편,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중앙은행 설립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금융계의 최고 자리를 두고 벌여왔던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의 치열한 신경전에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까지 가세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2016.2.28일자 중앙SUNDAY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 차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