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뱅크 도약? 덩치만 큰 공룡?

우리나라 은행산업은 1997년 금융위기 이후 활발하게 진행된 은행 간 인수ㆍ합병(M&A)으로 인해 소수의 대형 은행 중심으로 재편됐다. 이는 주요 선진국의 금융산업 추세와도 비슷하다. 선진국에서도 1990년대 이후 금융회사간 M&A가 활발하게 일어나 은행 숫자가 크게 줄었고 씨티은행,HSBC등은 메가뱅크(초대형 은행)로 거듭났다.
그 동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우리나라 은행의 대형화 추세에 대해 최근 들어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들은 은행들이 대형화의 과실(果實)을 금융 소비자와 공유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CD(양도성예금증서) 금리의 인상이 고스란히 담보대출을 받는 고객에게 전가되는 등 은행은 리스크를 고객에게 떠넘기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금융 서비스 질 개선은 은행 수수료 인상 폭에 미치지 못하다는 지적이다. 이에 반해 금융의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세계 유수 은행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내 대형 은행 간 추가적인 합병을 통해 메가뱅크를 탄생시키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있다.
두 가지 견해 중 어느 쪽 주장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것이 타당할까?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은행들이 합병하려는 이유와 은행 간 M&A가 금융 시스템의 효율성과 안정성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봐야 한다. 일례로 캐나다의 경우 은행 산업에서 경쟁이 제한될 것을 우려해 1998년 두 건의 대형 은행 간 합병 신청을 인가하지 않아 메가뱅크의 출현을 저지한 적이 있다. 그 이후 캐나다에서는 지금도 메가뱅크의 필요성에 대해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은행들이 합병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유인은 무엇일까. 우선은 규모와 범위의 경제,중복 설비 제거 등을 통한 비용 절감이다. 또한 우량 은행과의 합병을 통한 경영효율성 향상도 은행들이 합병을 추진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서 금융위기 직후 구조조정 차원에서 이뤄진 은행 간 합병은 이러한 두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 밖에 시장지배력 강화에 힘입은 수익성 확대와 다각화로 인한 파산 위험의 감소도 합병을 통한 대형화의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은행 대형화의 기대효과 중에서 비용 절감,경영효율성 향상,파산 위험 감소 등은 개별 은행에 이로울 뿐만 아니라 금융 중개비용 축소를 통해 금융 시스템의 효율성도 높인다. 그런데 시장지배력 강화는 좀 다르다. 개별 은행에는 이롭지만 금융 시스템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은행의 시장지배력이 강화되면 대출이자율이 상승해 일부 유망한 프로젝트가 실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용 절감,경영효율성 향상 등의 긍정적 효과가 시장지배력 확대 등에 따른 부정적 효과보다 더 클 경우에만 은행 대형화는 금융 시스템의 효율성 제고로 이어질 수 있다.

합병을 통한 대형화가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에 미치는 영향도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형화에 힘입은 개별 은행의 수익성 제고는 단기적으로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 제고에 기여할 수 있지만 대형 은행이‘대마불사(大馬不死)’를 이용해 과도한 리스크를 취하게 되면 이는 금융 안정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은행의 대형화 이후 나타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이 확보된 가운데,은행의 시장지배력은 별로 증대되지 않고 단위당 생산비용은 하락해 금융 시스템의 효율성이 높아지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은행산업은 그 동안 진행된 M&A로 인해 이미 소수의 대형 은행 중심으로 재편됐다. 앞으로 국내 대형 은행 간 추가적 합병을 통해 메가뱅크를 탄생시키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는 국제 경쟁력 확보 측면뿐 아니라 메가뱅크 출현 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포함,보다 다양한 논의가 계속돼야 한다. 경쟁력 있는 은행은 규모가 커지는 경향이 있지만,규모를 키운다고 해서 경쟁력이 저절로 확보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외환위기후 은행수 절반으로
외환위기후 은행수 절반으로

우리나라 은행산업에서의 인수ㆍ합병(M&A)은 1976년 서울은행과 한국신탁은행 간 합병이 최초이다. 그 이후에는 한동안 은행 산업구조에 큰 변화가 없다가 정부가 198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은행 신설을 허용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신한 한미 하나 보람 동화 동남은행 등이 은행산업에 진입했다.
그러나 금융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위해 M&A를 촉진하는 정책으로 선회한 결과 14건의 M&A를 통해 1997년 26개까지 늘어났던 은행이 2007년 10월 현재는 절반 수준인 13개로 대폭 감소했다.
지금까지 진행된 합병으로 우리나라 은행산업의 시장집중도는 크게 높아졌다. 시장집중도를 산정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는‘허핀달-허쉬만 지수(HHI)’로 측정할 경우 우리나라 은행산업의 시장집중도(총여신 기준)는 1997년 695에서 2006년 말 현재 1548로 대폭 높아졌다.
HHI는 개별 은행의 시장점유율 제곱의 합에 1만을 곱해 산출한다. 미국 법무성의 은행합병 가이드라인에서는 HHI가 △1000 미만이면‘경쟁적인시장’으로 △1000 이상 1800 미만이면‘다소 집중된 시장’으로 △1800 이상이면‘매우 집중된 시장’으로 분류한다. 이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은행 산업은‘다소 집중된 시장’으로 분류될 수 있다. 시장집중도가 높아지면 은행 간 경쟁이 약화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미국은 은행 간 합병을 인가할 때 시장집중도를 중요하게 취급한다.
합병으로 HHI가 200포인트 이상 상승해 은행산업이‘다소 집중된 시장’에서‘매우 집중된 시장’으로 변모하는 것이 예상되는 경우,규모의 경제 등으로 인해 은행의 생산비용이 충분히 하락할 것으로 기대될 때에만 합병을 인가하고 있다. 즉,은행 간 경쟁이 약화돼 금융 소비자의 이익을 침해할 소지가 있는 은행 간 합병은 승인 받기 어렵다. |
규모의 경제·범위의 경제
규모의 경제·범위의 경제
규모의 경제란 생산량을 증가시킴에 따라 제품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평균비용이 감소하는 현상을 말한다. 다만 규모의 경제는 일정한 생산량 수준까지는 나타나지만 생산 규모를 계속 증가시킨다고 해서 무한히 나타나지는 않는다.
일정한 생산 규모를 초과하게 되면 규모의 비(非)경제가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 범위의 경제는 생산되는 서비스 종류를 늘리는 과정에서 시너지효과로 인해 평균 비용이 하락하는 현상을 말한다.
합병하는 은행들 간에 경쟁력 있는 부분이 겹치지 않으면 범위의 경제 실현을 기대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