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오디세이 ⑪ 조선은행 감독권한 논란 - 일제 강점기에도 금융감독 밥그릇 싸움은 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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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등록일
2015.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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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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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교육기획팀(02-759-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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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1·2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직후의 모습. 당시 조선인 ‘수천 명’이 조직적으로 학살되었으나 최근 개정된 일본 중등교과서에서는 이를 ‘다수’라고 표현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3 관동대지진 당시 죽창등으로 무장한 일본인.]
 

오늘날에는 아주 당연하게 여기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상업은행의 자기자본에 대한 규제가 없었다. 그 규제를 1988년 국제결제은행(BIS)이 만들었다. ‘위험가중자산’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자본금이 그것의 8% 이상 되도록 감시하는 것이 시작이었다. 이것을 바젤협약(Basel Accords)이라고 하는데, 그 밑바탕에는 얄미울 정도로 독주를 계속하는 일본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당시 유럽계 은행들의 위험가중자산대비 자본금 비중은 8% 수준이었고, 일본계는 6% 이하였다. 따라서 유럽 국가들은 89년부터 이 협약을 적용하면서, 일본에는 93년 3월까지 유예기간을 주었다. 이 일정에 맞춰 일본계 은행들이 일제히 자산 다이어트를 하는 순간 신용경색과 함께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되었다. 90년 말 세계 10대 대형은행 중 9개가 일본계였으나, 현재는 1개만 남아 있다.

일본이 혼자서 태평성대를 구가하다가 어려움을 겪은 건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도 똑같았다. 전쟁 때문에 유럽 열강들이 수출을 멈춘 동안 일본은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렸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투자가 최고조에 이르러 20년 초부터는 물가 폭등과 주식시장 과열까지 나타났다. 하지만 그때를 고비로 수출감소와 재고누적의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20년 3월 15일 주가가 일제히 폭락했다. 4월 들어서는 예금인출사태가 나타나 7월까지 3개월간 169개 은행의 수신액이 썰물처럼 빠졌다. 이중 21개 은행은 휴업을 선언했다. 이것이 이른바 반동공황(反動恐慌)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전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워싱턴회의(1922년)에서는 일본이 시베리아에서 철군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는 해외판로의 축소를 의미했다.

[사진 설명:1899년 일본이 대만에 설립한 대만은행. 현재는 일반 상업은행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은행과 마찬가지로 발권은행을 겸했다. 1927년 금융공황 시 조선은행은 구제된 반면, 대만은행은 파산했다. 그것은 중요도 차이 때문이다. 조선총독의 궁내 서열은 6위(1위는 왕)이고, 대만총독은 11위였다.]
 

불황이 들춰낸 조선은행 부실
일본의 불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가옥과 건물이 붕괴하고 사상자가 속출했다. 지진 발생 다음날 출범한 야마모토(山本?兵衛) 내각은 즉각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9월 7일에는 모든 금융기관의 지급연기령이 공포되었다.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진 가운데 누군가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음모론을 퍼뜨렸다. 그러자 일본인들과 관헌들이 짜 맞춘 듯이 조직적으로 조선인을 체포·구타·학살하기 시작했다. 무고한 조선인 수천 명이 잔혹하게 희생되었다.

조선은행도 반동공황 전까지는 아주 잘나갔다. 19년 말까지 지점을 41개로 늘린 조선은행은 20년에는 사상최대의 수익을 올리고 10% 배당을 실시했다. 정부 지시로 실시한 대출(니시하라 차관)에서 엄청난 손해가 있었으나 당시에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부실대출을 줄이려는 노력이 적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선발주자인 요코하마정금은행을 제치고 만주지역에서 발권독점권을 확보하는 과정(금건화 계획)에서 신용도가 낮은 일본·중국 상인들에게 의도적으로 대출을 늘인 것이다.

그러다가 22년 2월 도쿄에서 열린 주주총회에서 마침내 사달이 났다. 어떤 주주가 “회수 불가능한 불량채권이 8200만 원”이라는 폭로성 항의를 했다(당시 납입자본금이 5000만 원이었다). 그 자리에서 미노베(美濃部俊吉) 총재는 극구 부인했지만, 6개월 뒤 다시 열린 주주총회에서는 부실채권 정리안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당축소와 긴축경영으로 손실을 만회하겠다는 고백이었다.

그러나 조선은행의 위기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대장성이 조사한 결과 원리금이 제때 걷히지 않는 대출이 1억 3467만 원이고, 이중 9608만 원은 회수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자본잠식의 책임을 조선은행 임직원에게만 물을 수도 없었다. 일본 정부도 상당한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선은행이 날린 돈 중에는 일로(日露)실업주식회사 출자금도 있었다. 이 회사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대러시아 채권을 잃게 된 일본인 채권자 구제를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인데, 사원 85명 중 대부분은 퇴역군인, 전직 관료, 은행퇴직자들이었다. 제대로 된 자산이 전혀 없는 껍데기뿐인 이 회사 설립에 조선은행이 1200만 원을 출자했다. 대장성의 지시로.
 



정리대상이  된 조선은행
잘못을 저지른 대장성은 예금부 자금(우편예금) 6900만 엔을 조선은행에 융자했다. 일본은행도 조선은행에 2000만 엔을 대출토록 했다. 저리 융자를 통해 조선은행이 대출능력을 회복하고 10여 년에 걸쳐 손실을 복구토록 한 것이다.

이런 조치들은 일본인들의 반감을 불렀다. 조선은행이 설립 취지와 달리 조선보다 일본과 만주에서 더 많이 대출하는 것이 못마땅하고, 일본의 도움으로 연명하는 것은 더욱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관동대지진까지 닥쳐서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자 24년 2월 미노베 총재가 경질되었다.

25년 3월에는 ‘조선은행 폐지법률안’까지 나왔다. 대장성이 마련한 이 법안은 조선은행을 분할해서 도쿄에 본점을 둔 특수은행 ‘동아은행’과 조선에서만 영업하는 상업은행 ‘경성은행’으로 전환하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나 이 안에 따르면, 조선과 만주에서 조선은행권이 사라지고 일본은행권이 쓰이게 된다. 일본·조선·만주를 단일 통화권으로 묶는 것은 과격한 발상이다.

결국 조선은행의 발권기능은 유지시키되 감자(減資)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다. 그동안 조선은행은, 니시하라 차관에 협조한다는 명분으로 17년부터 20년까지 3년간 자본금을 8배로 늘렸다. 대장성보다는 조선총독부에 매달려 진행한 증자였다. 그래서 대장성은 25년 7월 조선은행법을 개정하여 자본금 8000만 원을 4000만 원으로 줄였다. 법률 개정 뒤에는 총재와 부총재를 다시 경질하고 강력한 직원정리와 조직축소를 주문했다. 이후 조선은행은 ‘정리은행’이라는 별명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그러나 25년 조선은행법 개정의 핵심은 감독당국을 대장성으로 일원화하는 데 있었다. 대만은행 감독권이 대장성에 있던 것과 달리 조선은행의 감독권은 대장성과 조선총독부로 분할되어 있었다. 일종의 타협이었다.

대한제국 때 제정된 ‘(구)한국은행 조례’에서는 이 은행의 감독기관을 ‘한국정부’로 규정했다. 그런데, 대한제국이 사라진 뒤인 11년 이 은행을 승계하는 조선은행은 누가 감독하느냐의 의문이 생겼다. 대장성이냐, 조선총독부냐?

데라우치(寺?正毅) 조선총독은 조선총독부라고 주장했다. 식민지 행정기관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일은 조선에서 해결한다”는 원칙에 따라 항구적 입법권한까지 보유했다(칙령 제324호). 그 점에서 대만총독부와 달랐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이 해방될 때까지 모든 금융법을 제정하고, 금융기관들을 감독했다. 조선은행법은 예외적으로 일본 의회가 제정했지만 이 은행의 감독은 칙령에 따라 조선에서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 군부를 대표하는 데라우치의 주장이었다.

한편 패전까지 유지되었던 메이지헌법(제5조)에 따르면 의회는 왕의 입법 보좌기관에 불과하고 왕이 입법권을 가졌다. 따라서 왕이 조선총독에게 입법권한을 위임한 것에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행정기관으로서 조선총독부는 헌법에 따라 총리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금융문제에 관해 총리를 보좌하는 대장성은 조선총독부의 금융감독업무에 간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관료집단 대장성의 주장이었다.

이런 견해 차이는 내각이 보낸 공문을 하세가와(長谷川) 조선총독이 거부하고 반송하는 일촉즉발의 사태로 분출되었다(1917년). 이후 대장성과 조선총독부는 조선은행의 인사·조직·증자·발권한도를 두고 막후에서 사사건건 샅바싸움을 했다.

겉으로는 헌법논쟁 탈을 써
분명 그 싸움의 본질은 밥그릇 싸움이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우아하게 헌법논쟁의 탈을 쓰고 있었다. 중앙은행에 관한 문제가 헌법의 문제로 연결되는 경우는 많다. 금년 1월 유럽중앙은행(ECB)의 양적완화조치도 유럽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거치고 나서야 확정되었다. 조선은행을 둘러싼 헌법논쟁에서는 1국 2체제의 이중성이 문제의 근원이었다. 식민지 조선은 일본 본토의 연장선인가, 본토와 다른 특수지인가? 이중성의 문제는 한반도 통일과정에서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90년 전의 1국 2 체제에서 벌어진 엘리트 집단 간의 싸움에서는 대장성이 최후에 웃었다. 그것은 너무나 역설적인 결말이었다. 감독권 개편의 계기가 된 조선은행의 부실은 다름 아닌 쇼다(勝田主計) 대장상의 부실대출(니시하라 차관) 지시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대장성이 느닷없이 현실성 없는 ‘조선은행 폐지법률안’을 들고 나왔던 것은 그런 사실을 감추기 위한 적반하장이었다.

그러나 대장성의 기쁨은 잠깐이었다. 연속되는 오판과 실수로 더 큰 금융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2015.4.19일자 중앙SUNDAY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 차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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