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오디세이 ⑦일본이 세운 구(舊)한국은행 - 식민지 조선 침탈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 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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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금융
등록일
2015.01.27
조회수
15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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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교육기획팀(02-759-5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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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9년 첫 아침, 순종은 창덕궁 인정전에서 이토 히로부미 조선통감 일행의 하례를 받는 것으로 새해를 시작했다. 하지만 순종을 알현하는 이토의 머릿속에서는 대한제국이 지워져 가고 있었다. 조선을 합병하기 위한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중앙은행 설립 계획도 있었다.

 이토는 처음에 ‘일본은행 경성 지점’을 설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일본계 은행을 제외한 은행 점포 수가 24개에 불과해 상업은행들만 상대하는 일본은행의 경성 지점은 할 일이 없을 게 뻔했다. 따라서 개인과 기업을 상대로 상업은행 업무를 수행해 가면서 은행권 발행과 국고금 관리를 취급하는 은행을 세우기로 했다. 일찍이 영국은행(1694년)이 그러했으며, 일본이 대만에 설립했던 대만은행(1899년)도 그랬다.

[1909년께 출근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마차 뒷좌석 왼쪽) 조선통감과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일본군 사령관(훗날 제2대 조선총독). 이 무렵 이토는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을 마치고 구한국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등 한일병탄의 모든 준비를 완료했다. 그해 10월 26일 하얼빈에서 벌어진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이 한일병탄을 늦추지는 못했다. ] 

 

 

 당시 조선에 은행 점포들이 극히 적었던 것은 자본도 부족했고 은행업의 개념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제일은행이 1878년 부산에서 영업을 시작한 이후 원산과 인천 등에서도 제102은행, 제18은행, 제58은행 등 일본계 은행들이 속속 진출했으나 조선 정부는 이런 사태를 수수방관했다(20세기 초까지는 정부가 부여한 설립 인가번호를 은행 이름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 제일은행도 ‘인가번호 1번’이라는 뜻이다).

 은행업에 관한 조치가 처음으로 취해진 것은 1894년이었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조각된 김홍집 2차 내각이 일본의 훈수를 받고 탁지아문(度支衙門) 안에 ‘은행국’이라는 조직과 ‘은행조례’라는 법규를 세웠다. 그 이후 영국계 홍콩상하이은행 인천대리점(1896년)과 러시아계 합작은행인 한아은행(1898년)에 이어 한흥은행·한성은행·대한천일은행 등 국내 자본으로 설립되는 은행들이 등장했다.


[일본 오사카의 ‘114은행’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5/3은행(제5은행과 제3은행의 합병은행)’. 20세기 초까지는 설립 인가번호를 은행 이름으로 쓰는 것이 흔한 일이었고 오늘날에도 국제 송금에서는 은행 이름 대신 숫자로 된 SWIFT 코드가 쓰인다. 이는 은행의 지급결제 업무가 동업자 간 네트워크를 통해 집단적으로 수행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 진행 중인 ‘핀테크’ 혁명도 결국 이런 기반을 무시할 수는 없다.] 

 


구(舊)한국은행은 사실상 일본의 은행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은행, 즉 구한국은행은 상업은행들보다 늦은 1909년 11월 설립되었다. 수권자본금은 1000만 엔, 납입자본금 250만 엔이었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한국’과는 거의 상관이 없었다. 주식 공모도 일본에서 진행됐고 설립 허가도 일본 대장상(大藏相)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창립 총회 역시 도쿄상업회의소에서 열렸다. 1만 명 넘는 주주의 절대 다수(98%)도 물론 일본인이었다. 조선인 주주는 왕실과 7개 기업, 그리고 211인의 소액주주가 전부였다. 6인의 임원 중에는 조선인이 없었다.

 구한국은행의 주식 공모는 1909년 10월 엄청난 열기 속에 진행되었다. 경쟁률이 292대 1에 이른 데는 주주에 대한 투자수익 보장장치도 한몫했다. 정부는 주주들에게 5년간 최소 6%의 배당을 보장했다. 그 대신 최대주주인 한국 정부(30%)가 처음 5년간 배당을 포기하도록 했다. 다만 1200만 엔(납입자본금의 4.8배)까지는 한국 정부에 무이자로 대출토록 해 정부의 은행임을 분명히 했다.

 구한국은행의 간판은 2년간 유지되다가 1911년 8월 철거되었다. 은행 이름이 ‘조선은행’으로 바뀐 것이다. 이때 조선은행의 설립일도 1909년 11월로 소급했다. 한때 서구 열강을 의식해 일본이 예의상 불렀던 ‘한국’이라는 이름을 그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선은행’으로 이름이 바뀐 뒤 ‘정부의 은행’ 역할은 더욱 확대되었다. 이제는 일본의 국채까지 매입했다. 한?일 강제 병합 직후 일본 정부는 그들에게 적극 협조한 공로로 작위(爵位)를 받은 76인을 포함, 수천 명의 조선인에게 축하금을 뿌렸다. 그 축하금은 연 5%의 이자가 50년간 지급되는 기명식 국채(임시은사금공채)로 지급되었다. 채권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조선인들은 그것을 하루빨리 현금화하려고 안달했고 조선은행은 그것을 액면가로 사들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공개시장조작인데, 그 결과 ‘임시은사금공채’는 발행된 지 4년 만에 70%가 조선은행 금고로 회수되었다.
 

일본을 위한 조선은행의 공개시장조작

 이런 일을 지휘한 사람은 이치하라 모리히로(市原盛宏) 총재였다. 그는 일본인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기독교 신자였으며 한때 부목사로 교회 일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대단히 권위적인 인물이었다. 도시샤(同志社)대에서 강사로 일할 때 “학생은 교수에게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 비판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고집하다 학생들의 집단 반발로 강단에서 퇴출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예일대로 진학했다.

 경제학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이치하라는 금융계로 진로를 바꾼 뒤 승승장구했다. 일본은행 오사카 지점 대리와 일본 제일은행 요코하마 지점장을 거쳐 요코하마 시장(市長)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리고 제일은행으로 돌아와 경성 지점장에 임명되었다. 경성지점은 조선에서 발권 업무와 국고금 관리를 수행하는 중요한 곳이라서 지점장은 이사급이었다.

 이치하라에게 부여된 임무 중 하나는 일본 제일은행이 경성에서 항구적 중앙은행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건물을 짓는 것이었다. 기독교 신자인 그는 경성에서도 선교사들과 자주 접촉했다. 그중에는 예일대 동문 스크랜턴도 있었다. 의료선교사 스크랜턴은 때마침 자신이 관리하던 병원과 교회를 합해 더 큰 교회를 지을 계획이었다(이것이 오늘날 남대문시장 상동교회다). 이치하라는 스크랜턴의 교회를 사들여 지금의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건물을 지었다. 그 주변으로 조선저축은행(SC은행 제일지점)·조선상업은행·조선식산은행·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이 연이어 모여들면서 은행가(銀行街)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무렵 일본 정부는 조선에서 일본 제일은행 대신 새로운 중앙은행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다만 이치하라 지점장의 행정능력은 버리기 아까워 그를 구한국은행의 초대 총재로 임명했다. 권위적인 성품의 이치하라 총재 아래 구한국은행과 조선은행은 일본 정부를 향한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자세를 확실하게 지켰다. ‘임시은사금공채’ 매입이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시키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한 탓인지 이치하라 총재는 재임 7년차에 병을 얻어 갑자기 사망했다. 

 두 달 뒤 조선은행 총재로 임명된 쇼다 가즈에(勝田主計)는 도쿄대 법대를 졸업한 정통 대장성 관료로서 조선은행 총재로는 10개월밖에 근무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은행이 가야 할 방향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제시했다.

 구한국은행법을 조선은행법으로 바꿀 때 대장성 차관이었던 그는 “조선은행의 역할은 일본-조선-만주를 관통하는 경제안정대(엔 블록)를 견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조선은행 총재로 부임하자마자 조사실을 대폭 확대하고 유능한 직원들로 채웠다. 자료 수집과 현장답사를 통해 만주 지역의 경제와 화폐제도를 파악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이때 확고하게 형성된 조선은행의 조사 기능 중시 전통은 한국은행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흐르고 있다. 일본이 세웠던 다른 발권은행, 즉 대만은행이나 만주중앙은행에는 그런 분위기가 없었다).

 쇼다의 생각에 따르면 조선은행은 일본의 대륙 진출을 위한 금융적 도구다. 따라서 조선은행은 조선을 넘어선 존재여야 한다. 이는 데라우치 마사타케(寺?正毅) 조선 총독의 생각과도 같았다. 데라우치는 1916년 10월 총리가 되어 본국으로 돌아간 뒤 자기와 의기투합했던 쇼다를 대장상으로 임명했다. 얼마 후 도쿄로 찾아 온 조선은행 중역들을 만났을 때 쇼다는 “조선은행 본점은 아직도 경성에 있는가? 난 지금쯤 신징(新京·만주 지역)에 있는 줄 알았지”하고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조선은행, 국제투자기관의 성격 지녀

 쇼다는 자신의 농담 혹은 철학을 밀어붙였다. 조선은행이 중국·만주·시베리아 정부에 차관을 제공할 수 있도록 자본금을 두 배로 증액하는 내용의 조선은행법을 개정(1918년)한 것이다. 그때 쇼다는 일본 의회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조선은행이) 다소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으며 비밀을 엄격히 지키고 또 정부 명령에 따라 한층 기민하게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 법률 개정 취지라고 설명했다. 청일전쟁 직후(1895년)에는 일본은행이 조선 정부에 차관을 제공했었는데 이제 조선은행이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후 조선은행은 조선이건 만주건 시베리아건 일본 정부가 지정한 곳으로 달려가 시킨 일을 하는 철저한 ‘을(乙)’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은행은 한반도 안에서 돈을 찍어 한반도 밖으로 투자하는, 일종의 국제투자기관이었다. 이는 자산의 90% 이상을 미국 국채 등에 투자하는 오늘날의 한국은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선은행은 일본 정부가 시키는 일이라면 어떤 위험과 손실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화차관(對華借款) 혹은 니시하라 차관(西原借款)에 동원되는 바람에 손해가 막심했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2015.1.25일자 중앙SUNDAY
한국은행  커뮤니케이션국장 차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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