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오디세이 <46> 정치 바람에 휘말린 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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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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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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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9월 개최된 한미합동경제위원회(CEB)회의. 한국의 경제정책을 평가하는 CEB회의는 보통 영산 미군기지에서 열렸는데, 이날은 송인상 부흥부장관(테이블 오른쪽의 가운데)과 구용서 상공부장관(오른쪽) 윌리엄 원 경제조정관이 참석했다.[국가기록원]

인간의 역사는 남 탓에서 시작됐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때 아담은 이브를 탓하고, 이브는 뱀을 탓했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탓하고,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탓했다. 1840년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킬다 섬에 끔찍한 폭풍이 몰아쳐 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 섬 주민들은 새를 탓했다. 그 섬에만 사는 큰바다쇠오리(great auk)는 펭귄처럼 날지도 못하고 저항 능력도 없는 바보 새인데, 섬 주민들은 그 새 때문에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믿고 남획을 결의했다. 그 바람에 그 흔하던 큰바다쇠오리는 1844년 지구에서 멸종했다.


은행주 매각 결과 뒤집기 위해 인태식 장관, 한은법 개정 거론 이에 반발한 김유택 총재 사퇴‘한은 쇄신’ 내건 김진형 시대 열려


“제 말을 분명하게 알아들었다고 생각한다면, 저를 분명히 오해한 겁니다”라는 말로 유명한 앨런 그린스펀 전 미 연준(Fed) 의장은 애매하게 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2010년 의회청문회에서는 아주 분명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유럽계 은행들의 과도한 파생금융상품 투자 때문”이라며 남을 탓했다.

공직자가 남 탓하는 것은 치명적 결함이다. 그런데도 제7대 재무장관 인태식은 남 탓을 멈출 줄 몰랐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임명할 때 “역대 재무장관들이 대충자금(對充資金)의 사용방향을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성과가 없었는데, 자네가 나서서 미국 사람들을 설득해 보게”라며 임무를 부여했다. 대충자금이란 마셜 플랜에 따라 미국이 각국에 제공하는 원조물자를 현지에서 판매하여 얻는 수입금을 말한다. 그 수입금은 현지 정부의 일반 재정자금과 분리해서 중앙은행에 예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미국 ‘대외원조법’). 원조하는 미국이 현지 정부의 씀씀이를 감시하겠다는 뜻이었다.

한국의 경우는 미국의 감시가 유난히 강했다. 한국전쟁 중 체결된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1952년 5월)’에 따라 한·미합동경제위원회(CEB)가 대충자금의 사용을 결정토록 했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입김이 결정적이었다. 1972년 소멸될 때까지 대충자금에 대해 한국 정부는 결정권이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국가재정의 40%나 차지하는 대충자금을 비료공장이나 도로 건설에 쓰려고 했지만, 미국은 국방비와 일본에서 생필품을 수입하는 비용에만 쓰도록 했다. 일본을 극동지역의 교두보로 삼으면서 한반도에서 어떤 상황변화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태식 장관, 남 탓만 하다 1년 만에 경질

인태식 재무장관이 은행 민영화 경쟁입찰의 낙찰자(우선협상대상자)를 경려하려는 것을 비판하는 동아일보 사설(1956년 7월 13일자)

인태식은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도 자신이 미국 관리들과 담판을 지은 적이 없다. 그가 한 일은 협상이 지지부진한 데 대해 대통령이 분통을 터뜨릴 때 옆에서 맞장구를 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성공할 리 없었다. 훗날 인태식은 자신의 무소득을 “미국의 근시안적 극동정책” 탓으로 돌렸다.

대충자금에 관한 대미교섭이 부진하자 인태식은 느닷없이 “국가예산의 절감을 목표로 정부조직을 대폭 축소하겠다”고 발표했다. 타 부처 장관들이 평지풍파라며 반대하자 정부조직 개편계획은 ‘공무원 30% 감원계획’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경찰관·소방관·우편배달부 등 특수직의 감원에 대한 대책을 다시 묻자 우물쭈물하며 또 한발 물러났다. 이렇게 준비가 엉성했으면서도 “부처 이기주의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면서 훗날 남 탓만 했다.

임시토지수득세법(土地收得稅法)은 더욱 가관이었다. 국세를 현금이 아닌 현물 즉, 곡식으로 거둘 수 있도록 한 이 법은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제정됐다(1951년). 국군의 식량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에서 농민들이 쌀을 감췄다. 전쟁 인플레이션으로 가만히만 있으면 쌀 값이 저절로 몇 배씩 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쌀로 세금을 거뒀더니 농민의 불만도 컸고, 세금 걷기도 힘들었다. 인태식은 사세국장(오늘날 세제실장) 출신인 자신이야말로 그 법을 폐지할 적임자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 법은 결국 4·19 혁명 이후 폐지됐다. 훗날 인태식은 군량미 확보를 위한 압력이 너무 컸다며 국방부를 탓했다.

인태식의 남 탓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1956년의 은행주 불하(銀行株 拂下) 조치다. 정부가 보유한 시중은행 주식을 매각하는 과정이다. 인태식 장관은 취임 직후 우선협상대상자들을 교체했다. “당초 선정된 사람들은 경영능력이 부족하고 부채가 많아 처음부터 자격이 없었다”는 이유였다. 한마디로 전임자의 결정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느닷없는 변덕으로 온갖 시비가 끊이지 않자 결국 인태식이 1년 만에 경질됐다. 그리고 그가 비판했던 전임자 김현철이 다시 재무장관에 임명됐으니, 비판받을 사람은 인태식이었다.

1956년 말 한국은행법 개정 논란도 대표적인 적반하장이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그 논란은 인태식이 한은법 개정 의사를 밝힘으로써 시작됐다. 그러자 김유택 총재도 지지 않고 11월 27일 기자회견을 열고 재무부의 계획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 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워지자 대통령은 사태 수습을 위해 김유택의 사임을 요구했다.

그런데 인태식은 당시 상황에 대해서 “한은법을 개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김유택 총재와 나는 한 마음이었고, 둘이서 말다툼 한 마디도 교환한 적이 없었다. 그의 퇴임은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고 발뺌했다. 자신은 한은법 개정에 관해서 한마디 말조차 입에 꺼낸 적이 없는데 김유택 총재가 혼자서 흥분해서 대통령의 분노를 샀으므로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김유택 총재의 사퇴가 여론을 악화시켜 마침내 대통령이 특별성명을 통해 유감의 뜻을 밝혀야 했던 것에 대해서 인태식은 “일개 한은 총재의 사표를 수리하면서 대통령이 담화까지 발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1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며 능청을 떨었다. 너무나 명백한 거짓말이라서 당시에도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식산은행 출신 총재 취임에 한은 술렁

인태식 제7대 재무장관 3.4.6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라 정치 감각이 뛰어났다.[국가기록원]

인태식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김유택 총재를 사퇴시킨 것은 그가 재무장관으로서 거둔 거의 유일한 성공이었다. 돈키호테 형의 그답지 않게 철저한 계산 끝에 실행했기 때문이다. 한은법 개정안은 전임 김현철 장관시절에 발표되어 이미 한차례 논란을 일으켰었다. 은행주 불하 이후 주주의 자격을 잃게 되는 재무부가 은행들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한은의 은행감독권한이라도 회수하겠다는 계획이었는데, 설득력은 약했다. 여당 수뇌부도 무리라고 판단하고 한은법 개정을 접는 것으로 끝났었다.

그런데 7차례의 입찰을 통해 확정된 은행주 불하 결과는 자유당 수뇌부를 실망시켰다. 제3대 대통령 선거에 도움을 준 재벌들이 탈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료 출신인 김현철 재무장관이 이기붕 계열의 현역의원 인태식으로 교체됐다. 그때 인태식의 임무는 이미 발표된 낙찰 결과를 뒤집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언론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장차 쏟아질 비난의 물줄기가 약해진다. 게다가 이기붕 국회의장은 평소 자신의 측근인 김교철 조흥은행장을 한은 총재에 앉히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인태식은 한은법 개정 문제로 공연한 시비를 걸었다. 예상대로 김유택 총재의 격렬한 반발은 언론에는 좋은 기삿거리를, 이기붕에게는 좋은 빌미를 제공했다.

김유택에게 사태의 책임을 돌리고 사퇴시키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교철 행장이 후임 총재직을 극구 사양했다. 일이 꼬였다. 이기붕이 난감해 하자 인태식이 재빨리 김진형 대한금융조합연합회(대한금련, 농협의 전신) 회장을 대타로 내밀었다. 김진형은 한국은행 창립 멤버이기는 하지만, 조선식산은행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영어실력이 출중하고 외환업무에 밝아 미 군정청 시절 조선환금은행의 행장을 맡았다가 이 조직이 한국은행 외국부로 흡수되면서 한국은행에 부총재로 합류했다(3월 26일자 칼럼 참조).

김진형은 5년 넘게 한국은행에 근무하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김유택과 박숙희가 총재와 수석부총재가 되어 속속 자신을 추월했기 때문이다. “조선은행 출신들이 설치는 마당이고 보니 내내 설움을 면치 못했다”고 회고하며 1955년 가을 대한금련 회장으로 떠났다(『재계회고』).

김진형은 답답했다. 외환전문가인 자신이 외환업무가 허락되지 않는 대한금련에 ‘붙잡혀’ 있으니 스코틀랜드의 큰바다쇠오리처럼 ‘멸종’할 수 있다는 위기감도 느꼈다. 자신의 처지를 한은의 배타적 문화에 희생된 탓으로 돌렸다. 그는 호시탐탐 권토중래를 노리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점잖게, 그리고 자주 한은의 쇄신을 주장하고 다녔다. 인태식이 보기에 그런 김진형이야말로 한은을 길들일 최고의 카드였다. 인태식과 김진형은 일본 야마구치(山口)고등상업학교 선·후배이기도 했다.

식산은행 출신인 김진형이 총재로 취임하자 한은 직원들은 크게 술렁였다. 반면 재무부와 한은의 관계는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워졌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2017.9.10일자 중앙SUNDAY
한국은행 금융결제국장 차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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