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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 오디세이 <47> 정부의 대리인 역할 맡은 김진형 총재

구분 화폐·금융
대상 일반인
경제교육기획팀 (02-759-5321) 2017.10.24 3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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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미국 기업인 일행을 맞이하는 김진형 총재(왼쪽 셋째). [사진 국가기록원]
태양왕이라 불리는 루이14세가 72년이나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불과 다섯 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통치 능력이 없는 아들을 위해 그의 어머니는 이탈리아 출신의 추기경 마자랭을 총리로 임명했다. 신성(神聖) 수호에 힘써야 할 사제가 세속의 왕권을 보좌하는 상황에서 루이14세의 왕권신수설이 다듬어졌다. 

김정렴 재무부 보내 영향력 확대 식산은행 출신 불러들여 한은 장악 한은이 번 돈은 모두 국고에 넣고 발권력 동원해 산업은행도 지원



진정한 루이14세 시대는 1661년 마자랭이 사망하면서부터다.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니콜라 푸케는 자신이 마자랭의 뒤를 이을 것을 확신했다. 루이14세의 어머니가 전폭적으로 신임했고, 왕실의 은밀한 재정사정을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2세의 루이14세는 총리 자리를 없애고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조급해진 푸케는 성대한 파티를 열어 왕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왕을 위한 그 파티에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의 명문 귀족들이 전부 참석했다. 그들은 난생 처음 맛보는 동양 요리의 행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몰리에르의 최신 희곡 공연을 보며 푸케의 예술적 안목에 감탄했다. 푸케의 정원과 분수의 화려함 앞에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푸케는 바로 다음날 체포됐다. 국고횡령죄였다. 그동안 세금을 빼돌린 것은 사실이지만, 왕실의 지시에 따라 왕의 어머니에게 전달했을 뿐이다. 하지만 근위대장 달타냥(소설 『삼총사』의 실존 모델)은 그를 체포해 피레네산맥의 외딴 감옥에 가뒀다. 푸케는 거기서 20년을 썩다가 죽었다. 
  
푸케는 루이14세가 어떤 인물인지 몰랐다. 루이14세는 자신이 태양처럼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는 인물이었다. 그는 남에게 뒤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런데 푸케의 파티는 집주인을 돋보이게 만들고 왕을 한낱 손님으로 만들었다. 기분을 잡친 왕은 즉각 푸케를 제거하고 장바티스트 콜베르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콜베르는 “거위의 깃털을 뽑되 비명 지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징세의 기술”이라며 지독하게 세금을 거뒀다. 그리고 그 돈은 왕에게 직접 흘러가도록 시스템을 고쳤다. 왕은 넉넉해진 재정사정을 믿고 푸케의 성을 모델로 하여 더 웅장하고 더 화려한 궁전을 지으니 그것이 베르사이유궁이다. 
  

1958년 3월 아시아여자농구대회에서 우승한 뒤 경무대를 방문한 한국은행 여자농구팀. 이승만 대통령 뒤에 김진형 총재가 서 있다. [사진 한국은행]

여자농구팀이 일본 이길 때마다 경무대로

푸케의 몰락이 주는 교훈은, 보스보다 더 빛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국제신사’라는 별명을 가진 김진형은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1958년 1월 18일 한국전쟁 중 파괴된 본관건물(현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이 복구된 것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한은 총재 김진형은 그 행사에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국회의장을 초대해 권력자들과의 친분을 과시했지만, 절대 나서지는 않았다. 파티의 주인이었음에도 사진 한 장 찍지 않고 다소곳이 대통령과 국회의장의 옆에 서서 그들을 주인공으로 추켜세웠다. 

1958년 한국은행을 방문한 이기붕 국회의장.

김진형은 권력자를 기쁘게 하는 일에 능했다. 나라 살림이 빠듯하여 국가대표팀이 없었던 시절 한은 여자농구팀은 사실상의 국가대표팀이었다. 그 팀이 국제대회에서 일본을 꺾고 국위를 선양할 때마다 김진형은 젊은 여자선수들을 데리고 경무대를 찾아갔다. 그리고 연로한 대통령의 극일(克日) 감정을 달래주는 기쁨조가 됐다. 1950년 창단해 1996년 해단될 때까지 여자농구팀을 한은 총재가 이끌고 대통령을 만난 경우는 김진형이 유일했다. 
  
경무대와의 교류에는 대통령의 여비서도 한몫했다. 한국전쟁 직후 공무원의 월급수준이 형편없었을 때 대통령의 여비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때 김진형은 한국은행 여직원을 경무대로 파견 보내는 형식으로 대통령의 고민거리를 해결해 줬다. 형식상 한국은행 직원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넉넉한 월급을 받는 대통령의 여비서 즉, 김진형이 경무대에 침투시킨 ‘문고리 권력’은 한은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대통령과 접촉할 기회를 만들어 줬다. 
  
김진형은 재무부에도 직원을 침투시켰다. 조사부 차장 김정렴이 그 예였다. 김정렴은 아버지인 김교철 조흥은행장에 이어 은행에 근무하는 것을 천직으로 알았다. 그래서 1959년 3월 재무장관에 임명된 송인상이 그에게 이재국장 직을 제의했을 때도 아버지와 상의한 뒤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김진형 총재가 불러 생각을 바꾸라고 거듭 종용하자, 부모와 처의 반대를 무릅쓰고 재무부로 향했다. 
  
당시 김진형은 재무부와 접점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일본 야마구치(山口)고등상업학교 선배였던 인태식 재무장관의 추천으로 총재가 됐는데, 장관이 바뀌자 재무부와 거리가 생겼다. 그러던 중 개각이 이루어져 식산은행의 후배 송인상이 재무장관에 취임했다. 신임 장관이 자신을 보좌할 인재를 찾자 김진형은 재빨리 김정렴의 등을 밀었다. 


김영찬·김영휘 등 수석부총재로 영입

그러나 재무부 직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당시에는 민간인이 이재국장으로 임명되는 일이 많았는데, 대개 은행의 임원급이었다. 그런데 신참 차장에 불과한 인물이 이재국장에 임명되자 자질을 못 믿겠다며 출근을 저지한 것이다. 결국 김정렴은 장차 부하들이 될 직원들이 출제한 헌법·행정법·경제학 시험을 치른 뒤에야 부임했다(미국 유학경력 때문에 영어시험은 면제됐다). 그렇게 재무부 생활을 시작한 김정렴은 훗날 장관이 됐다. 재무부와 가까워지려고 침투시킨 부하직원이 마침내 그 사령탑을 점령했으니 김진형의 목표는 초과 달성된 셈이었다. 
  
김진형 자신은 정부가 한은에 침투시킨 트로이의 목마에 가까웠다. 그는 인사상의 전통을 깼다. 총재로 임명된 직후 재무부의 요구대로 조선은행 출신인 박숙희 수석부총재를 저축은행(훗날 제일은행)으로 내보내고 김영찬 재무차관을 받았다. 총재와 수석부총재가 동시에 교체된 첫 사례였다. 2년 뒤 김영찬이 산업은행 총재가 되어 떠나자 이번에는 산업은행의 김영휘 부총재를 한은의 수석부총재로 끌어왔다. 아무 연고가 없는 외부인사가 수석부총재가 된 첫 사례였다. 아울러 본인이 식산은행에서 데려온 김기엽 외국부장을 부총재로 승진시켰다. 이로써 한은 집행임원 6인 중 3인이 식산은행 출신으로 채워졌다. 
  
김진형의 파격은 그뿐만이 아니다. 한국은행은 매년 연차보고서를 발행한다. 연차보고서에는 한은의 업무상태뿐만 아니라 ‘통화 및 정부의 외환정책과 금융경제 상태를 분석’토록 되어 있다(한은법 제102조). 한국은행 연차보고서가 대한민국의 경제백서인 셈이다. 김유택 총재 시절에는 연차보고서에서 경제상황과 정부정책에 관한 기사가 100쪽에 가까웠다. 일찍이 장기영 조사부장이 세운 전통이었다. 그러나 김진형 총재 시절에는 절반에 가까운 50여 쪽으로 축소됐다. 그리고 4·19 혁명 이후 다시 100여 쪽으로 늘어났다. 김진형 총재 아래서 정부정책을 평가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 넘은 정부 지원이 자유당 비자금 돼


김진형은 정부를 평가하는 것보다 돕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한국은행은 이익금 중 30%를 준비금으로 유보한 뒤 나머지를 국고로 귀속시킨다(한은법 제99조). 설립 당시에는 유보율이 25%였고, 준비금에도 5억원의 상한선이 있었다. 당시 5억원은 천문학적 숫자고, 거기에 이르는 것을 먼 미래의 일쯤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전쟁과 인플레이션 때문에 그 상한선은 설립 3년 만에 싱겁게 돌파했다.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자 한은 내부에서는 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김진형은 그런 의견을 철저히 묵살했다. 그리고 임기 내내 이익금의 100%를 군말 없이 국고로 귀속시켰다. 그의 재임기간 중 한은의 자산은 70% 이상 증가했지만, 자본은 한 푼도 늘지 않았다. 당시 한은은 ‘깃털을 몽땅 뽑히면서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 거위’였다. 그 거위를 품은 김진형은 재정을 살찌우는 데 혈안이었던 콜베르와 다르지 않았다(한은 준비금의 상한선은 5·16 쿠데타 이후 폐지됐다). 
  
김진형의 콜베르 역할은 이익금 처분뿐만 아니라 통화정책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1954년 영업을 시작한 이래 산업은행은 자금조달이 어려울 때마다 한은에 채권(산금채) 인수를 요청했다. 그러던 중 1957년 2월 제1회 산금채의 만기가 돌아왔다. 금통위원들은 그동안 충분히 지원했다고 생각하고 자금을 회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김진형은 정부의 연락을 받고 금통위원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산금채 재투자안을 가까스로 통과시켰다. 그때부터 산금채의 만기가 돌아올 때마다 재투자하는 것은 금통위의 연례행사가 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958년 4월에는 금통위 회의에서 긴급동의를 통해 산업은행에 대한 대출 일부를 아예 한은의 대출한도에서 제외했다.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한은이 발권력을 통해 산업은행에 건넨 돈은 재벌을 거쳐 자유당으로 흘러들어갔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2017.10.8일자 중앙SUNDAY
한국은행 금융결제국장 차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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