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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 오디세이 <48> 외부출신 김진형 총재의 조직개혁

구분 화폐·금융
대상 일반인
경제교육기획팀 (02-759-5321) 2017.11.21 3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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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으로 크게 손상된 당시 한국은행 본점 건물(현재 화페박물관)을 복구하는 공사가 1954년 시작됐다. 김진형 총재는 전후 신입행원을 크게 늘리는 등 적극적으로 한은 조직개편에 나섰다.[중앙포토]

전쟁은 세대 간의 불평등을 높인다. 일본의 쇼와 히토게타(昭和一桁) 즉, 쇼와 한 자리 수 해(1926~1934)에 태어난 사람들은 학창시절 시도 때도 없이 군사훈련을 받거나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대피하는 바람에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크게 출세한 사람이 극히 드물다. 출세와 성공은 후배 세대들의 몫이었다. 
  

신입행원 10명서 40명으로 늘려 김명호·나웅배 등 57행번 급부상
융자·외환 업무 등은 정부에 넘겨 관치금융 심해지는 단초 되기도









전쟁은 같은 세대끼리의 불평등도 증폭시킨다. 한국의 쇼와 히토게타인 전두환(1931년생)은 부모를 쫓아 만주에서 몇 년을 허탕치느라 학업이 늦었다. 그래서 스무 살이 돼서야 대구공고를 졸업했지만, 그 덕분에 동갑내기들이 전쟁터에서 무수히 죽어가던 1951년 육군사관학교로 직행했다. 그리고 1955년 ‘첫 번째 정규 졸업생도(11기)’의 영예를 얻었다. 
  
그와 반대로 김건(1929년생, 훗날 한은 총재)은 일찍 학업을 마치는 바람에 전쟁을 피했다. 어머니(화가 나혜석)가 계시지 않아 남들보다 일찍 학교에 들어 간 김건은 홀아버지를 쫓아 부산·광주·대전을 전전하면서도 늘 우등생 자리를 지켰다. 더군다나 ‘SO군번’ 제도 즉, 대졸예정자들이 단 2개월의 군사훈련으로 병역의무를 마칠 수 있는 특혜까지 놓치지 않았다. 덕분에 1951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한국은행의 ‘첫 번째 대졸 신입직원’의 영예를 얻었다. 
  
장충식(장하성 현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의 부친)은 그 반대였다. 장충식은 김건의 광주 서석초등학교와 서울대 동기동창이었지만, ‘SO군번’ 제도를 알지 못했다. 때문에 낙동강 전투에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큰 부상을 입고 제대한 뒤 김건보다 10년이나 늦게 한국은행에 취직했다. 두 동갑내기의 회복할 수 없는 격차는 전쟁 중 ‘SO군번’이 만든 ‘격세지감’이었다. 
  
한국전쟁이 만든 또 다른 불평등의 분수령은 1957년이다. 쇼와 히토게타를 갓 넘긴 한국의 1935년생들은 한국전쟁 때 고등학생이라서 징집을 면했다. 그리고 1953년 대학을 입학해서 1957년 졸업과 더불어 사회에 쏟아졌다. 그들이 직장인이 되었을 때는, 마치 흑사병이 지나간 중세의 유럽 대륙처럼 고급인력이 진공상태였다. 능력 있는 사람들은 선배들이 별로 없었던 덕분에 사회 초년생일 때부터 금방 두각을 드러낸 뒤 각 분야에서 오랜 기간 주역이 되었다. 이회창 판사가 그런 경우였다. 


신영복 돕기 위해 장학금 만들기도


한국은행에서도 ‘57행번(1957년 신입직원)’들이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상당수가 시골에서 농사짓다 뒤늦게 ‘53학번’이 되었지만, 그 덕분에 한국은행에서 세력이 제일 큰 ‘57행번’의 일원이 됐다. 그리고 몇 명 안 되는 선배들을 쉽게 압도했다. 김명호(훗날 한은 총재)처럼 끝까지 한국은행에 남았건, 나웅배(훗날 경제기획·재무·상공·통일부 장관, 국회의원), 이경식(부총리), 신철규(현대종합상사 사장, 신현송 BIS 수석이코노미스트의 부친)처럼 일찍 한국은행을 떠났건,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봉이 되었다. 
  
한국은행에서 ‘57행번’이 많은 것은 필연이었다. 전쟁 직전 출범한 한국은행은 전쟁이 끝나면서 폭발적인 성장기를 맞았다. 1954년 은행법의 시행과 더불어 은행감독업무가 대폭 늘었다. 외국환 업무도 급격히 팽창하여 외환관리부가 신설되었다. 1955년에는 국제통화기금(IMF) 가입을 계기로 국제기준에 따른 국민소득통계를 만들기 위해서 조사부가 대폭 확장됐다. 
  
그런데도 김유택 총재는 직원을 늘리는 데 소극적이었다. 당시 크고 작은 사고가 이어져 정부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포에서는 ‘춤바람 난 여직원들이 댄스홀을 드나들며 불량한 남자들과 어울린다’는 가십기사가 지역 신문에 보도되는가 하면, 부산에서는 출납직원이 공무원과 짜고 세금을 빼돌리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사회 전체가 이완될 때 한국은행 직원들도 정신무장이 흐트러진 것이다. 심계원(오늘날의 감사원)으로부터 내사와 질책을 받는 상황에서 직원을 늘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 책임에서 자유로운 후임 총재 김진형은 10명도 안 되던 신입직원 수를 갑자기 40명 수준으로 늘렸다. 그것은 한은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길이기도 했다. 당시 직원들은 대부분 조선은행 시절 채용되어 식산은행 출신의 김진형을 껄끄럽게 생각했다. 김진형은 ‘57행번’ 같은 신진 세력을 통해 한은에 남아 있는 조선은행의 흔적을 지우려고 했다. 



한은법·금통위 무시하고 대기업에 특혜

김진형 한국은행 총재


‘국제신사’라는 별명답게 김진형의 대외 이미지는 아주 훌륭했다. 젊은 직원과 대학생들에게는 특별히 자애로웠다. 예를 들어 부산상고 후배인 서울대 상과대학 신영복(훗날 성공회대 교수) 학생이 돈이 없어 자퇴할 지경이라는 말을 듣고 ‘한은 장학금’을 만들어 줘서 미담의 주인공이 됐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상당히 독단적이었다. ‘한은 장학금’이 신영복 학생을 위해 만들어진 것을 안 직원들은 “총재가 후배만 봐주려고 머리를 썼다”며 수군거렸다. 미국이 잉여농산물을 한국에 팔면서 자국 법률(소위 미공법, 약칭 PL480)에 따라 한국에게 지급보증을 요구하자 김진형은 1958년 8월 금통위를 동원해서 미국 상품신용공사(Commodity Credit Corp.)에게 선뜻 지급을 보증했다. 당시 부흥부의 요구에 따른 것이지만, 일개 외국회사에 대한 한국은행의 지급보증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통화정책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한국은행은 금통위뿐만 아니라 ‘융자위원회’를 두고 있었다(최초 한은법 제74조).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별도로 공개시장위원회(FOMC)를 두고 있는 미 연준(Fed)을 참고한 것이다. 융자정책에 관해서는 한은 직원으로 구성된 융자위원회가 먼저 심의하고, 금통위가 그 결과를 보고받은 뒤 다시 의결했다. 김진형은 그런 구조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하고 융자위원회 운영을 대폭 축소했다. 1956년 25건에 이르던 융자위원회의 보고가, 57년에는 10회, 58년에는 3회, 59년에는 2회로 계속 줄었다. 



통화스와프에 관여 않는 관행도 생겨

신진 세력인 한은 57행번의 부상을 다룬 당시 신문기사.[사진 한국은행]

결국 사달이 났다. 1958년 4월 17일 김진형 총재는 융자위원회를 거치지 않은 의안을 금통위 회의 도중 긴급동의 형식으로 발의했다. 산업은행을 통해 재벌에 지원된 ‘연계자금’ 15억환을 한은의 대출한도에서 제외한다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이야기지만, 1958년 5월 총선 패배가 뚜렷해지자 자유당은 비상수단을 동원했다. 시중은행에 압력을 가해서 산금채를 담보로 중앙산업과 삼호방직 등 대기업에게 대출해 주도록 하고, 대출받은 기업들로부터는 리베이트를 받았다. 이를 ‘산업은행 연계자금’이라고 불렀는데, 김진형은 자유당의 요청을 받고 ‘산업은행 연계자금’ 루트를 통해 몇몇 특정 기업에 대출해 줬다. 금통위에는 15억환까지만 보고됐지만, 훗날 드러난 총대출액은 77억환이었다(1960년 7월 19일 법정 진술). 
  
김진형은 히토게타(一桁) 한국은행 즉, 아직 십 년이 안 된 초창기 한국은행을 지휘하면서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그는 모든 방법을 다해 한국은행을 정부에 바싹 붙였다. 동시에 직원들의 정책토론과 검증은 축소했다. 그가 유명무실하게 만든 융자위원회는 1963년 한은법 개정 때 결국 폐지되었다. 금통위만 있는 현재의 한국은행은, 복수의 법정 위원회를 두고 있는 미국·영국·호주 중앙은행들과 다르다. 
  
그가 남긴 것도 있다. 김진형은 중앙은행이 외환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비정상이라고 믿었다. 그가 공부한 제국주의 일본에서는 정부 산하의 특수은행인 정금은행(正金銀行)이 외환업무를 독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총재로 일했던 미 군정청 산하의 조선환금은행이 1949년 조선은행에 흡수되자 몹시 불평했다. 한국은행법이 제정된 뒤에는 한국은행 도쿄지점 주재 부총재로서 외환업무를 지휘하면서 ‘외환 업무는 중앙은행의 일이 아니다’며 본부에 보고하는 일을 최소화했다(그래서 구용서 총재의 오른팔 장기영 부총재와 암투를 벌였다). 
  
그런 김진형의 생각이 한국은행에 그대로 남아 있다. 한국은행은 외국 중앙은행과의 통화스와프계약을 금통위가 의결하지 않는다. 통화스와프계약을 통화정책(한은법 제28조)이나 한국은행의 중요업무(제29조)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한국은행을 놔두고 정부가 통화스와프계약을 언급해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통화스와프계약을 통화정책 수단이라고 판단하고 정책위원회가 의결하는 미국·유럽연합(EU)·스웨덴·스위스 등 대부분의 중앙은행들과 크게 다르다(외환정책은 각국 재무장관 소관이라는 점과 별개다). 
  
한편, ‘연계자금’은 결국 김진형의 발목을 잡았다. 4·19혁명 직후 금융계의 적폐청산이 진행될 때 김진형은 부정선거 자금조달의 죄로 수갑을 찬 채 법정에 섰다. 한은 총재로서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2017.11.5일자 중앙SUNDAY
한국은행 금융결제국장 차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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