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율곡 이이의 초상을 화폐 앞면의 주도안 소재로 하고 있는 5천원권임에도 1972년 처음 발행될 당시의 초상과 1977년 이후에 발행된 초상은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1972년에 처음 발행된 5천원권의 이이 초상화 는 갸름하고 작은 얼굴에 큰 눈, 오똑한 코 등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어 마치 서양인 이 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있는 것처럼 어색한 반면 1977년 이후부터 발행된 5천원권의 이이 모습은 동양적인 얼굴에 근엄하면서도 자상한 모습을 하고 있어 우리에게 친근감을 준다.
그렇다면 동일 인물을 화폐도안으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그 첫째 이유로는 공식적으로 인정할만한 이이의 초상화가 전해 내려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5천원권 발행을 준비할 당시 종중 이나 사설단체에서 사용하던 이이 영정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는 공신력이 없어 그 대안으로 당시 한 신문사에서 어느정도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제작해 놓은 조각상을 화폐도안으로 채택하였는데 이는 1973년 이후 표준영정제도에 의해 공인된 표준 영정과 다른 영정이었으므로 표준영정을 기준으로 1977년에 발행된 5천원권과는 화폐도안의 기준부터가 달랐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이이 초상 도안 조각자가 외국인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국내 제조기술로는 은행권 원판을 제작할 수가 없어 영국에 있는 은행권 제조회사(Thomas De La Rue)에 제작 의뢰하였는데 이들이 이이 초상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정서 와 기준으로 콧날을 높이는 등 서구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거쳐 만들어진 5천원권이 시중에 유통되면서 이이 초상의 화폐도안에 대한 논란이 야기됨에 따라 결국 1977년에 표준영정에 의한 새로운 5천원권이 발행되면서 5천원권의 율곡 이이 초상이 크게 바뀌게 된 것이다.
참고로「표준영정제도」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기준없이 제 각각으로 그려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1973년 문화관광부 (당시 문화공보부)가 동상·영정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철저한 고증을 거쳐 표준적인 그림사진을 제작하도록 한 것인데 이이 의 표준 초상은 일랑 이종상 화백이 그렸다.
그리고 율곡 이이 초상 이외에도 우리나라 화폐의 도안소재로 사용하고 있는 세종대왕, 퇴계 이황, 충무공 이순신의 초상도 모두 표준영정을 사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