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 프로농구 리그(NBA)에 조그만 체격의 동양인 선수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하버드 경제학과 출신의 ‘제레미 린’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대학 및 프로리그에서 철저히 무시당하며 무명의 세월을 보내야 했지만, 주전선수들의 부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천금같은 출전기회에서 슈퍼스타급 활약을 선보이며 전세계 농구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지난 2월 한 달간 평균 20.9득점, 8.4도움이라는 특급 기록을 작성한 그의 등장은 작은 체격의 동양인 가드는 NBA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통설을 통쾌하게 깨뜨렸으며, NBA를 꿈꾸는 많은 동양인 선수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 장대 같은 흑인 선수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덩크를 꽂아 넣는 만화와도 같은 그의 활약은 동양인 팬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한편 그의 등장과 함께 한국 농구계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왜 우리는 제레미 린과 같은 선수를 배출하지 못 했는가’라는 질문이 스포츠 뉴스 농구 란의 주요한 주제로 다뤄졌다. 그동안 하승진, 방성윤 등 한국 최고의 농구선수들이 NBA의 문을 두드렸지만, 모두 참담한 실패를 경험하고 국내로 복귀하였다. 뿐만 아니라 80~90년대 중국과 쌍벽을 이루며 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했던 한국 농구의 수준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우승 이후 내리막길을 걸어, 현재에는 필리핀, 중동 국가들에게 아시아 2인자의 자리를 내주고야 말았다.
우리나라는 1997년 프로농구 리그를 발족하면서 외국의 우수한 선수들과 국내 선수들을 경쟁시켜 국내 선수들의 경쟁력을 제고하고 리그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용병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이는 예상과는 다른 결과를 낳았다. 전희철, 현주엽 등 ‘농구대잔치’ 시절 최고로 꼽히던 선수들이 압도적인 체격과 기량을 자랑하는 용병들에 밀려 후보 선수로 전락하였으며, 국내 선수들의 역할은 대부분 용병들을 보조하는 수준에 국한되었다. 심지어는 용병을 어떻게 뽑았는가에 따라 각 팀의 순위가 크게 요동칠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용병들이 국내 리그를 장악한 셈이었다.
센터 및 포워드 역할을 용병들이 도맡으면서 국내 선수들은 주로 가드 포지션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국내 유망주들이 프로 진출을 위해 용병과 경쟁해야 하는 센터 포지션을 기피하면서 한국 농구의 국제 경쟁력은 점차 하락하기 시작했다. 90년대 '마지막 승부‘와 ’슬램덩크‘ 열풍을 등에 업고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농구는 결국 이상민, 우지원과 같은 스타를 더 이상 배출하지 못하면서 팬들의 외면을 받았고, 현재에는 지상파 TV에서 중계조차 하지 않는 스포츠로 전락하고 말았다. 선수들의 발전을 위해 도입된 용병제도가 왜 이러한 부작용을 일으켰을까?
캠브리지대 장하준 교수는 자신의 저서 ‘사다리 걷어차기’를 통해 충분히 여건이 성숙되지 않은 산업 부문을 개방할 경우 월등히 수준 높은 외국 산업과의 경쟁과정에서 국내 산업이 고사되고 만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보호무역주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재의 선진국들은 과거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수출산업에 대한 정부 보조금, 관세제도, 독점권 인정 등 다양한 보호무역 수단을 활용하였다. 이들 국가는 영국과 같은 앞서있는 산업국을 따라잡기 위해 유치산업을 보호하고, 외국의 숙련인력을 빼돌렸으며, 선진국들이 수출을 금지한 기계를 밀수하고 산업스파이를 고용하는가 하면 다른 나라의 특허 및 상표를 계획적으로 도용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지나 자신들이 선진국의 대열에 오르면 자유무역의 효용을 역설하고 이를 다른 국가에 강요하였으며 지적 재산권의 보호 등을 통해 자국의 기술을 보호하는데 주력하였다. 이와 같은 행태를 장하준 교수는 ‘사다리 걷어차기’라고 명명하였다. 자신들이 위로 올라가기 위해 유용하게 사용한 사다리를 남이 올라오지 못하게 걷어차는 행동에 빗댄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보면 한국 농구는 스스로 사다리를 걷어찬 셈이다. 아직 국내 농구의 수준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프로농구 흥행을 위해 성급하게 용병제도를 도입하면서 오히려 국내 선수들을 고사시킨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최근에는 경기에 동시 출전할 수 있는 용병의 수를 팀당 2명에서 1명으로 축소하여 이와 같은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이미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누적된 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충분한 성숙 기간을 거쳐 상당 수준의 국제경쟁력을 확보한 후 용병제도를 도입하여 오히려 리그에 활력을 불어넣은 스포츠 종목도 있다. 바로 야구이다. 1981년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출범한 프로야구 야구는 탄탄한 지역연고제를 기반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하며 리그의 수준을 선진화하였다. 이에 따라 1998년 용병제도를 도입하였음에도 이를 오히려 발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결국 야구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하고, 일본, 미국 등 선진 리그로 국내의 훌륭한 선수들을 오히려 역수출하며 국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스포츠 리그로 자리매김했다.
2011년 한-EU FTA에 이어 올해 한-미 FTA가 발효되면서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 수준의 경제영토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경제성장 촉진효과에 대한 기대도 높아졌으나, 한편으로는 대대적인 개방에 따라 일부 경쟁력이 떨어지는 산업의 고사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제조업은 프로야구의 사례처럼 개방에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미 사다리가 필요없을 정도의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의 경우 우리나라 제조업의 제레미 린이라 부르기에 손색없는 성과를 국제시장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에 반해 농업, 서비스업 등 선진국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져 개방에 따라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산업도 존재한다. 물론 부존자원이 거의 없고 내수시장이 작은 우리나라에 대외개방을 통한 성장동력 확보는 필수적이다. 다만 개방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프로농구의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스스로 사다리를 걷어찬’ 결과가 초래되지 않도록 국제경쟁력이 미비한 일부 산업에 대해 치밀한 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생산성 제고를 위한 정책지원 등을 통해 개방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대응방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은행 김동우조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