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
안녕하세요, 문소영 기자입니다. 저는 중앙일보와 뉴욕타임스가 제휴해서 나오는 영어 신문 '코리아 중앙 데일리'의 문화 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들려드릴 이야기는 명화 속에 숨겨진 경제학 코드에 대한 것입니다. 즉, 옛 그림 속에 숨겨진 경제적 사건들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과 반응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옛 그림, 명화가 경제학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화가들은 시대의 변화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며, 그 시대적 변화는 언제나 경제적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옛 그림에 나타난 이야기라도 현대에 벌어진 사건들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공유하려고 합니다.
#1 튤립 광풍 이야기
처음 할 이야기는 튤립 광풍 이야기예요. 여러분들 아마 튤립 얘기를 갑자기 웬 튤립 하실지 모르지만, 만약에 여러분들이 요즘 광풍을 일으키고 있는 코인 투자나 암호화폐에 조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튤립과 관련한 뭔가를 들어보셨을 거예요. 왜냐하면 전문가들이 지금 이 코인, 암호화폐 열풍이 튤립이냐 아니냐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거든요. "암호화폐가 튤립이라고? 그게 무슨 얘기야?" 라고 하실지 모르겠는데, 튤립에 대한 투자와 투기 열풍이 불었었고, 그것이 버블로 쾅 터지는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이를테면 요즘 정말 열풍이 대단한데, 암호화폐 비트코인 들어보셨죠? 이더리움 그런 것들이 있는데, 심지어 도지코인이라고 거의 이런 암호화폐 붐이 부니까 거의 장난스럽게 만든 코인이 있는데, 이것까지도 일론 머스크라는 테슬라 CEO가 자기 트위터에 이렇게 띄우니까 이것까지 막 가격이 올라가는 거예요.
전문가들이 이걸 보고 어떤 전문가들은 "암호화폐는 우리의 미래다. 지금 화폐들은 다 각국 중앙은행이 발행을 하고 중앙은행의 통제를 받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 그걸 벗어난 화폐 시대가 올 것이다. 그러니까 암호화폐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다른 전문가들은 "암호화폐라는 게 사실 어떤 내재적인 가치가 있는데? 도대체 어떤 근본적인 가치가 있어서 이렇게 가격이 비싼건데? 이거 튤립이야" 이렇게 말을 하는 거죠.
그럼 대체 튤립에 대해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걸 지금부터 명화들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이 아름다운 꽃 그림을 보실까요? 이 그림은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정물화입니다. 이 시기를 황금시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네덜란드가 유럽에서 가장 번성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즉 1600년대는 네덜란드가 유럽의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미술사적으로 미술은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지역에서 발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재 세계 미술의 중심지는 미국 뉴욕이고, 세계 경제의 중심지도 미국입니다. 이런 패턴은 과거에도 비슷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꽃피울 때, 이탈리아는 교역과 유럽 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1600년대에는 네덜란드가 유럽 교역의 중심지가 되면서 많은 신흥 부자들이 등장하고, 부가 축적되었습니다.
신흥 부자들은 부를 과시하기 위해 좋은 옷을 입고, 소위 명품이라고 불리는 럭셔리 패션 제품을 소유하며, 집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집을 장식하기 위해 그림이 필요하므로 정물화와 풍경화가 발달했습니다. 더불어 정원을 꾸미기도 했습니다. 돈 자랑의 일환으로 정원에 비싼 식물을 심었는데, 그 중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이 터키에서 건너온 튤립이었습니다.
현재 튤립 하면 네덜란드를 떠올리지만, 사실 튤립 축제를 크게 하는 나라 중 하나는 터키입니다. 원래 튤립의 원산지는 터키입니다. 1500년대 오스만 트루크 제국 시절부터 튤립이 네덜란드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부자들은 튤립을 정원에 심고, 정물화에도 튤립을 반드시 포함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처음에는 실수요가 많아지면서, 경제학적 법칙에 따라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게 되면 공급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외국에서 물 건너 들어오는 튤립을 재배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희귀한 식물이었기 때문에 공급은 적었습니다. 신흥 부자들이 많아지면서, 이들이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튤립을 사려 하니 가격이 점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들이 보고, "어? 저게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까 이만큼 올랐어? 또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까 이만큼 올랐어?"라고 생각하며 나도 이걸 사서 팔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딱 요즘의 코인 열풍과 비슷합니다. 친구가 코인 하나를 샀는데 갑자기 한 달 만에 몇백, 몇천을 벌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신의 연봉만큼 벌어들였다는 사실에 눈이 뒤집히기 시작하죠. 그래서 너도 나도 튤립 구근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신흥 부자들의 수요에 의해 꽃 정물화들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이 꽃 정물화가 단순히 아름다운 서정적인 그림 같지만 사실 이것도 돈 자랑이 담겨있는 그림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비싼 꽃이 그림의 꼭대기에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장 비싼 꽃이 무엇인가요? 바로 튤립입니다. 그리고 튤립 중에서도 줄무늬가 있는 튤립입니다. 붉은 줄무늬가 있는 튤립인 샘페르 아우구스투스의 가격은 튤립 투기가 한창 일어날 때인 1633년도에 5500플로리니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전혀 감이 안 오실 텐데, 당시 평범한 직업들, 예를 들어 목수나 직공 같은 사람들의 연봉은 당시 괜찮은 편이었는데도 많아 봐야 300 플로린이었습니다. 그리고 황소의 가격은 당시에도 꽤 비쌌는데, 한 마리 가격이 약 120 플로린이었습니다. 즉, 튤립 하나의 가격이 황소 46마리의 가격이었다는 뜻입니다. 엄밀한 경제학적 계산은 아니지만, 만약 일반인의 직장 연봉이 3000만 원에서 6000만 원이라고 가정하면, 튤립 하나의 가격이 거의 10억 원을 넘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는데요.
그렇게 된 이유는 신흥 부자들뿐만 아니라 구 귀족들, 심지어 굴뚝 청소부까지 그동안 모은 돈을 다 털어 튤립을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가격이 급등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런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돈을 많이 번 상인이, 한 선원의 덕분에 배로 교역을 성공적으로 하게 되어 신세를 많이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원을 초청해 식사를 대접했는데, 청어요리를 대접하며 "잠깐 볼 일이 있으니 드시고 계세요" 하고 자리를 비웠습니다. 선원이 청어를 먹다가 뭔가 허전해서 보니 양파 같은 것이 있어 그것을 곁들여 먹었습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선원이 "청어를 먹는데 뭔가 더 필요해서 양파를 같이 먹었는데 괜찮죠?"라고 하자, 주인이 뒷목을 잡고 쓰러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양파'가 바로 샘페르 아우구스투스 튤립의 알뿌리였기 때문입니다. 이 선원은 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재산 손실을 일으켰기 때문에 결국 감옥에서 몇 달을 지내야 했다고 합니다. 그런 난리가 났던 시점이었어요. 그래서 그 당시에는 그림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대략 1640년경에 그려졌습니다. 원래 1633년에 그 튤립의 가격이 거의 10억 원을 넘어섰을 정도였고, 그 가격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는 1637년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들이 모두 바보여서 튤립 알뿌리 하나를 이런 어마어마한 가격을 주고 사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의 코인 투자 심리와도 비슷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가격이 낮을 때 사서 고점에 팔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그 고점이 언제인지, 거품이 언제 터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위험한, 도박적인 상황이 연출되는 것입니다. 결국 1637년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튤립을 팔려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가격이 너무 높아서 살 사람이 없었죠. 그래서 팔려고 내놓은 사람들이 "아, 이제 고점인가 보다. 빨리 팔아야겠다" 하면서 가격을 낮추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본 다른 사람들도 드디어 이 튤립이 거품이 빠지기 시작했구나, 빨리 팔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튤립을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공급은 넘쳐나지만 수요는 없어지는 공급초과로 인해 가격이 급락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불과 이틀 사이에 95% 가격이 떨어졌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그러니까 갑작스럽게 벼락 부자가 되었다가 벼락 거지가 되어버린 상황이었죠.
이 사건을 풍자하는 그림이 바로 1640년경, 거품이 터진 후 약 3년 뒤에 나오게 됩니다. 이 그림은 얀 브뤼헐 2세라는 화가가 그린 것입니다. 이 화가는 유럽에서 유명한 네덜란드 거장인 피테르 브뤼헐의 손자입니다. 대를 이어서 화가를 하는 경우가 유럽에는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은 풍자적 요소가 강조된 작품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간적 순서로 튤립 투기가 펼쳐지는 과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림 왼쪽 부분을 자세히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이 튤립을 대단히 값진 자산으로 여기던 시점을 보여줍니다. 이 부분에 원숭이가 그려져 있는데, 사람을 원숭이로 그린 것입니다. 화가는 이를 통해 "너희들은 원숭이만큼 뇌가 작은가 보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바보 같은 행동을 비웃고 있습니다. 그림에서 검을 차고 있으면 귀족임을 의미하는데요, 이 그림에서 원숭이로 묘사되고 있는 귀족은, 흡족해하는 듯 자신이 소유한 튤립 목록을 살피고 있습니다.
그림 가운데에만 해도, 즐거웠던 상황이 연출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튤립을 쌓고 무게를 달아 가치를 측정하며 금을 쌓아두고 거래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오른쪽 끝 부분에서는 튤립 버블이 터진 상황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노란 튤립을 들고 눈물을 훔치며 끌려가는 사람들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빚을 내어 투자를 했는데, 튤립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빚을 갚지 못하게 되어 끌려가는 상황입니다. 안쪽에도 보면 가치가 급격히 떨어진 붉은줄무늬 튤립을 들고 눈물을 훔치는 원숭이의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맨 오른쪽에 있는 원숭이를 보면 너무 격분한 나머지 한때 몇 억에 달했던 특별한 튤립을 내동댕이 치고 소변을 누고 있는 장면도 그림에 담겨 있습니다.
이 그림은 사람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원숭이에 빗대어 비판하고 있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온 현상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과학자 중 한 명인 아이작 뉴턴도 그의 시대에 ‘남해(South Sea)버블’이라는 큰 투기 버블 사건에 휘말려서 엄청난 재산을 잃은 경험이 있습니다.
이 튤립 강풍이 지나간 후에 심지어 이런 그림도 등장하게 됩니다. 이 그림은 '바니타스(Vanitas)'라 불리는 작품으로, 매우 무섭습니다. 그 중앙에는 해골과 모래시계가 있고, 왼쪽에는 튤립이 있습니다. 바니타스는 하나의 그림 장르로서 헛된 것, 허영을 뜻하며, 이는 튤립 투기가 일어나기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해골과 모래시계는 이 그림 장르의 전형적인 필수 요소입니다. 이는 죽음 이후에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상징입니다. 우리는 천년을 살지 않으며, 백세까지 살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죽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래시계의 모래알이 떨어지듯이 죽음에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고, 결국 해골처럼 됨을 상징합니다. 이를 고려할 경우 그림에 나오는 진주 목걸이나 고급스러운 금, 회중시계와 같은 부귀영화, 쾌락과 기쁨을 상징하는 것들 또한 모두 헛된 것입니다. 그리고, 꽃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아름다운 꽃조차도 결국 시들어가며 우리가 젊을 때는 아름답지만 결국은 죽음을 맞이할 것임을 상기시킵니다. 이것이 '메멘토 모리'라 불리는 것으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서구에는 이렇게 ‘우리는 언젠가 죽는 존재다’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전통이 있으며, 이는 죽음을 터부시하는 동양적 가치관과는 상이한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이런 식의 해골이 있는 그림은 재수가 없다고 여겨 구매하려는 수요가 많지 않겠지만, 서구에서는 일부러 자신의 초상화에도 해골을 같이 넣어 달라고 하는 등 ‘메멘토모리’를 상기시키고자 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과 더불어 바니타스라는 그림도 등장하는 것이죠. 아무리 부귀영화를 추구한다 해도 결국 죽으면 모든 것이 헛된 것입니다. 너무 이런 것에 아끼고 또 아등바등하지 마세요. 내면적인 영혼을 생각하세요. 이런 교훈을 주는 그림들입니다. 이 그림은 바니타스의 일종으로 그려진 그림인데 특이한 점을 살펴보세요. 앞서 보여드린 그림 보다 훨씬 단순하고, 모든 금은보화, 꽃다발 등 많은 것들이 튤립 하나로 축약되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튤립 하나가 인간은 결국 시들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헛된 부귀영화와 돈 등을 상징합니다. 단 하나의 튤립이 이러한 것들을 상징하게 된 것은 엄청난 튤립 투기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투자와 투기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경제학자들도 그 부분은 매우 애매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어떤 대상에 대한 내재적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값이 오르기 때문에 차익을 내려는 목적으로 뛰어든다면 이를 투기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같은 대상도 지혜롭게 접근하면 투자일 수 있으며, 그냥 차익을 목적으로 하면 투기가 될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극심한 튤립 버블을 경험한 후에 튤립에 싫증을 느끼고 튤립을 다 버렸다면 지금의 네덜란드는 튤립의 나라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 경험을 교훈삼아 어리석은 튤립 투기를 반복하지 않고, 튤립에 지혜롭게 투자하여 많은 품종을 개발하고 화훼와 원예의 강국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투자와 투기의 차이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2 산업혁명과 인상주의
두 번째로는 산업혁명에 대한 그림을 좀 볼까요? 산업혁명이라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예술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J.W.M 터너의 그림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제가 영국에서 1년 석사를 할 때 자주 방문했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지난 해 영국의 20파운드 지폐 디자인이 바뀌었는데,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초상화에서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라는 그림으로 도안이 변경되었습니다. 애덤 스미스와 터너의 그림 사이에는 실제로 깊은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이 그림은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으로 선정된 '전함 테메레르'입니다. 사실 원제목은 "최후의 정박지를 향해 끌려가는 전함 테메레르"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테메레르는 검은 증기선이 아니라 뒤에 있는 창백한 돛대를 내리고 있는 하얀 범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전함 테메레르는 나폴레옹이 전쟁을 일으켰을 당시 트라팔가 해전에서 활약한 전함으로 넬슨 제독이 이끄는 함대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증기선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한때는 영웅적인 배로 명성이 자자했던 테메레르를 해체하여 목재로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슬픈 결말을 템즈 강에서 목격한 영국의 화가 터너가 깊은 인상을 받아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터너는 영국에서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화가입니다. 그 이유는, 경제적 중심지와 예술 중심지가 일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탈리아 르네상스 때의 이탈리아가 그랬고, 그 다음에는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였습니다. 20세기 아방가르드 미술도 대부분 프랑스에서 발전했으며, 현재는 미국 뉴욕이 예술의 중심지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경제적, 문화적으로 강대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에서는 이상하게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현재는 영국 런던이 미국의 뉴욕과 더불어 현대 미술의 중심지로 떠올랐는데, 이상하게19세기 대영제국의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에도 영국 미술은 위상이 높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영국 미술사에서 다른 유럽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거의 유일한 화가가 바로 터너였습니다. 그의 작품을 보면 그가 어떻게 이렇게 강력한 영향력을 지닐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당시 터너는 이미 나이가 많았고 영국 로열 아카데미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아카데미에 소속된 화가들은 증기선 같은 현대적 주제를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 시기에는 주로 신화적인 주제나 고대 그리스 신화를 포함한 풍경을 그리는 것이 인정받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당시 터너가 그린 현대적 증기선 그림까지는 사람들이 크게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그 당시 귀족 후원자들이나 아카데미 회원들이, 해체되기 위해 증기선에 끌려가는 테메레르에 감정을 이입하면서 천박한 증기선과 산업혁명과, 신흥 부르주아들이 등장하는 시대의 변화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림이 다소 멜랑꼴리한 느낌을 주잖아요? 석양이 아름답게 물든 풍경 속에서, 마치 최후의 영광을 상징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당시 사람들은 테메레르 범선에 대한 옛 향수를 담아낸 작품이라고 이 그림을 해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터너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흉측한 증기선이 고귀한 시대의 범선을 끌고 가고 있다는 관점에서 절망적인 한탄과 함께 작품을 그렸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왜냐하면 터너가 이 그림 다음에 그린 작품 때문입니다.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의 제목은 "비, 증기, 속도-대서부철도"입니다. 이 시기에는 그림에 이런 제목을 붙이는 일이 드물었고, 그림 스타일도 매우 현대적으로 느껴집니다. 이 그림이 1844년 작품임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거친 붓질로 현대적인 속도감과 역동감이 느껴지고 있죠. 특히 증기기관차는 굉음을 내면서 대각선 방향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작품을 본 사람들은 다 경악합니다. "아니, 위대한 터너 선생님이 이런 천박한 물건인 증기기관차를 그리다니?"라며 놀랍다는 반응을 합니다. 또한 그의 붓질 방식도 극명하게 다르다는 인상을 줍니다. "물감을 다 뭉개놨나? 이분이 나이가 들면서 노망이 나셨나?"라는 식의 반응이었죠. 터너는 이 그림을 그릴 때 이미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의 나이는 환갑을 넘어서 거의 70세에 가까웠는데, 당시에는 이 나이가 매우 노년의 나이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그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적, 시대적 변화를 흥미롭게 받아들이는 민감함을 지녔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직접 기차를 타보며 새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기차를 타면서 뒤로 창문을 통해 풍경이 휙휙 지나가며 잔상이 남는 효과를 경험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몸소 체험한 후에 터너는 이를 그림으로 재현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작품은 매우 현대적이고 도전적인 양상을 보이며 사람들의 놀라움을 자아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터너가 속도라는 개념을 간파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산업혁명은 그저 농경사회에서 산업화로의 전환만이 아니라 우리의 속도, 생산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혁명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와 관련해 애덤 스미스 얘기가 나옵니다. 예전 20파운드 지폐에는 애덤 스미스의 초상과 함께 그가 언급한 핀 공장의 그림이 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한 사람이 핀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설명하며, 분업을 통해 생산성이 얼마나 증가하는지를 예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분업을 통해 열 사람이 하루에 48,000개의 핀을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단순한 생산량의 증가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생산 속도가 확연히 향상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생산성의 증가는 증기기관차나 증기선과 같은 교통수단을 통한 물리적인 시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산의 전반적인 속도를 빠르게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생산의 속도, 그리고 심지어는 생각하는 속도까지도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원래 철학자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경제학자라는 용어가 없었고, 경제학은 정치경제철학이라고 불렸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이러한 철학뿐만 아니라 모든 사고 방식이 분업화되어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예언이 현실화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마디로 말하자면, 산업혁명은 속도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산업혁명의 속도를 제대로 보고 예술에 표현을 했던 선지적인 화가, 터너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 바로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들입니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터너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이죠. 그 당시 미술의 중심지는 프랑스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미술의 중심지에 오히려 영향을 준 것이 터너였습니다. 더욱이 인상주의 미술은 현대 미술의 물꼬를 튼 미술로 여겨집니다. 심지어 어떤 미술사학자들은 인상주의 미술부터를 현대미술로 분류하기도 하며, 전통적인 미술에서 현대미술로 오는 그 사이에 인상주의 미술이 있다고 얘기를 합니다. 인상주의 미술의 클로드 모네의 생 라자르 역 그림을 보면 터너의 기차 그림과 굉장히 닮았다는 걸 아실 수 있습니다. 증기 기관차가 어마어마하게 증기를 뿜어내며, 현대적인 건축물인 유리와 철골로 된 역 안으로 속도를 줄이며 들어오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특징은 모네의 그림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굉장히 거칠고 빠른 붓질을 합니다. 산업혁명의 속도와 그로 인해 달라진 세상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달라진 속도의 그림이 필요하다고 인상주의 화가들은 봤던 것입니다.
이 그림은 물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를 그와 이름도 비슷한 마네가 그린 것입니다. 모네는 배를 타고 다니면서 햇빛이 물에 반사되는 모습을 빠른 붓질로 그려냈습니다. 현장에서 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특히 중요하게 생각한 전통입니다. 이전에는 풍경화를 그릴 때에도 자신의 아뜰리에 안에서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물감을 직접 만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산업혁명의 결과로 튜브 물감이 발명되면서, 인상주의 화가들은 튜브 물감을 사용하여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다양한 효과로 표현했습니다. 그 뒤에는 영국의 터너라는 선각자와 같은 화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영향받아 클로드 모네의 ‘일출-인상’이라는 그림과 같은 작품이 등장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을 보고 인상주의라는 용어가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비난의 의미로 사용된 말입니다. 이 그림을 보고 평론가가 "이건 그리다 말았냐?" 이런 얘기를 하면서 제목에 인상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을 보고 인상주의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모네 같은 화가는 "그래, 그게 내가 추구하던 거야. 우리를 인상주의라고 부르겠어"라고 받아들인 거죠. 그 평론가의 반응이 이럴 수밖에 없는 게, 똑같은 1873년에 그려진 이 그림을 보세요. 이게 바로 그 시대까지 아카데미에서 그려진 전통적인 풍경화인데, 보이는 것과 같이 사진 같은 그림을 진정한 그림으로 생각했던 것 입니다. 근데 왜 모네는 이제 이런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었느냐, 사진이 나와버렸기 때문입니다. 역시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진이 나왔기 때문에 이런 사진 같은 그림을 더 이상 그릴 필요가 없게 된 것이죠. 그리고 그 대신 사진이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그러니까 시시각각 변하는 빛에 반응하는 우리의 감각 등을 표현하기로 한 것입니다. 사실, 동틀 때나 해질 노을이 너무 아름다울 때 사진을 찍잖아요. 근데 사실 그 사진이 내가 본 것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사실 많아요. 그런 사진으로 표현할 수 없는 시시각각 변하는 그 상황을 빠른 붓질로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그린 게 바로 이 모네의 인상인 거예요.
그리고 그 뒤부터 화가들은 이제 점점 인상주의를 따르게 되었는데, 내 감정으로 내가 기분이 우울할 때 보는 풍경은 다 일그러져 보인다는 말이죠. 그럼 난 그 일그러진 풍경을 그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게 내가 보는 거니까.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사진 같은 그림을 버리고 여러 가지 그림을 추구하게 되면서 현대미술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를 생각할 때, 우리는 터너라는 화가가 시대의 격변에, 특히 경제적 변화에 굉장히 선구적으로 반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뉴딜 아트
세 번째 이야기는 뉴딜 아트에 대한 것입니다. 이제 좀 더 현대적인 시대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17세기의 튤립투기에서 시작해서, 그 다음으로 19세기 초의 산업혁명, 그리고 인상주의로 넘어왔으며 이제 20세기 초로 왔습니다. 그런데 뉴딜이라고 하면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최근 코로나 시기에 경제가 침체되자 뉴딜 정책이라는 것이 언급되고 있기도 합니다. 새로운 뉴딜, 한국형 뉴딜 등의 얘기가 많이 나오죠. 그럼 뉴딜과 뉴딜 아트는 뭘까요? 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사실 뉴딜 아트는 주로 미국에서 얘기되는 것입니다. 그 전에 알아야 할 것은 멕시코 벽화운동입니다. 20세기 초에 멕시코에서 벽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은 멕시코가 서구의 영향을 벗어나 멕시코의 전통과 원주민 문화를 반영하고자 한 것입니다. 대중들에게도 접근성이 높은 벽화와 같은 예술을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이 벽화 운동의 거장 중 한 명이 디에고 리베라입니다. 그는 또 하나의 유명한 화가인 프리다 칼로의 남편으로도 유명합니다. 프리다 칼로의 남편으로서는 부정적인 면모도 많았지만, 스승으로서는 좋은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술가로서 뛰어났으며 프리다 칼로에게도 예술적 영감을 주었습니다.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작품들은 그녀의 개인적인 고통을 반영하는 것과 동시에 멕시코 원주민과 유럽인의 혼혈이라는 그녀의 혼합적인 정체성을 그림 속 의상 등을 활용하여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디에고 리베라의 영향이 어느정도 있었습니다.
디에고 리베라는 멕시코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자로서 미국의 자본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그림 중 하나가 '월스트리트 연애'입니다. 이 그림은 흥미롭습니다. 그림 뒤쪽의 머리가 하얀 세 명은 실존 인물입니다. 그 당시 미국 시장을 주름잡던 자본주의 아이콘들로, 포드 자동차의 창업자인 포드, 유명한 스탠포드 오일 창업주 락커펠러, 금융 거물 JP 모건입니다. 그리고 그림에는 종이 테이프를 든 인물들이 보입니다. 이 종이 테이프는 주식 시장에서 주가가 찍혀 나오는 종이입니다. 이 그림은 연회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주가를 확인하는 모습을 풍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마치 예언적인 그림처럼 여겨집니다. 1928년에 그림이 그려진 후 1929년에 미국 주식 시장이 폭락하면서 대공황이 시작되었습니다. 대공황 시기에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 등 다양한 사진들이 남아 있습니다. 무료 급식소 앞에서 대기 중인 실업자들의 모습도 그 중 하나입니다. 더 아이러니한 점은 이 무료 급식소를 세운 사람이 알카포네라는 악명 높은 마피아였다는 것입니다.
대공황 시기의 침체 정도를 보면 1929년 실업률은 약 3%였지만, 1932년에는 실업률이 거의 25%로 치솟았습니다. 산업 생산도 절반으로 감소하면서 미국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영향을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보호무역 정책이 강화되면서 무역이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기업들에게 타격을 주었고 경제 상황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은 광적인 애국심, 타국에 대한 배타주의와 같은 전체주의적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현재 코로나 시국에도 세계적으로 많이 보여지고 있는 현상들이에요.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결국 전체주의로 빠지고 파시즘에 휘말리며 전쟁을 일으키게 됐어요. 그런데 역사적으로도 아이러니한 점은 이들이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대공황이 종료됐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모두 전쟁에 나갔기 때문에 실업자가 없어졌거든요. 물론 대공황이 종료된 것은 단순히 전쟁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뉴딜 같은 정책적 힘도 있었고, 이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이 있죠.
그래서 대공황이 왜 발생했을까요? 왜 갑자기 1929년에 주식이 폭락하는 등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냥 주식이 폭락해서 그런 건 아니었어요. 일단 내구재는 한번 사면 굉장히 오래 사용하기 때문에 수요에 주기를 갖게 되고 경기 사이클이 존재하는데, 내구재 수요가 줄어드는 시점에서 과잉 생산이 이루어져 수요보다 많이 공급됐던 시점이었고, 그 때문에 경기가 위축됐어요. 그러던 와중에 연착륙이 필요한 상황에 정부가 급격하게 금융 긴축정책을 사용하면서 경기조절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공황의 원인과 종료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자들 간의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 사이클을 타고 어느 날 주가가 폭락하면 주주들은 갑자기 충격을 받아 소비와 투자를 줄이게 됩니다. 이로 인해 소비재와 자본재의 재고가 쌓이게 되고 그 결과 가격이 하락하게 되면서 기업들은 생산을 줄이게 되고, 생산 감소에 따라 고용이 줄어들고 고용 감소로 인해 실업자가 늘어나게 됩니다. 실업자들은 돈을 많이 쓰지 않게 되고, 이는 다시 소비를 줄이고 이 과정이 계속해서 악순환을 만들어냅니다.
금융 측면에서는 기업들이 도산하게 되면 은행에 빚을 갚지 못하고 은행들이 파산할 수 있습니다. 파산하지 않은 은행들도 돈줄을 줄이고 건전한 기업에게만 돈을 빌려주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공황 상황에서는 아무리 건전한 기업들도 버티기 어렵기 때문에 재정 상태가 위태로워지게 되고, 은행에서 대출도 쉽지 않아 돈이 급격히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실업자가 더 많이 나오고, 이는 경제 침체로 이어집니다.
애덤스미스로 시작된 고전주의 경제철학에서는 내버려 두면 시장이 자율적으로 작동하여 균형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봤습니다. 예를 들어 실업이 늘어나면 임금이 낮아지고, 그로 인해 기업들이 저렴한 노동력을 고용할 수 있어 생산이 늘어나고, 이로 인해 다시 경제가 회복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물가도 마찬가지로, 물건이 팔리지 않으면 가격이 하락하여 사람들이 물건을 구매하게 되고, 이는 다시 경제가 회복될 수 있는 요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케인스의 경우에는 총수요를 강조하여, 가계의 소비, 기업의 투자, 정부의 지출의 합인 총수요가 총공급보다 적은 상황이 계속해서 경제 악순환을 유발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 난국을 타개하려면 총수요를 억지로 늘릴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갑자기 개인들에게 돈을 주어서 물건을 사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기업들에게는 세제 혜택 등을 통해 투자를 촉진할 수 있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이는 여력이 있는 기업들에게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정부가 특히 재정을 활용하여 정부 지출을 증가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케인스의 유효수요 이론을 기반으로 미국 루즈벨트 행정부는 대규모 정부 지출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뉴딜 정책입니다. 정부는 다리나 댐을 세우거나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여서 일자리를 증가시키는 방법으로 경제 회복을 시도했습니다. 지금과 같이 일자리가 자동으로 늘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정부가 직접 투자를 증가시켜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 뉴딜정책의 핵심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술 분야에서도 뉴딜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제 침체로 인해 사람들이 먼저 줄일 수 있는 소비는 문화, 예술 소비일 것입니다. 그 결과 문화예술 분야에서 타격을 입은 예술가들을 어떻게 고용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 중 하나가 공공미술이었습니다. 특히 그 시대에는 벽화가 중요한 공공미술 중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벽화는 주로 우체국에 그려졌습니다. 미국의 우체국은 동사무소와 같은 기능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장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공공 기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3,700여명의 예술가들을 고용하여 우체국에 벽화와 조각을 만드는 데 투입하였고, 이를 뉴딜 아트라고 불렀습니다. 특히 이러한 벽화들은 뉴딜 벽화라고 불리며, 그 규모는 점점 커졌습니다.
이러한 뉴딜 벽화는 앞서 언급했던 디에고 리베라의 멕시코 벽화 운동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우체국 벽화는 일반 미국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예술관 문턱이 높았던 사람들도 쉽게 예술을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체국에 그려진 벽화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교과서에 나오는 민족 기록화와 같은 느낌을 주지 않나요? 이처럼 건전한 그림들만 그려졌던 이유는 정부 예산으로 지원받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이 작업에 많은 간섭을 합니다. 예를 들어, 누드를 잘 그리는 화가에게도 누드를 그리지 말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추상화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추상화와 아방가르드 예술이 발전하고 있었지만, 미국 정부는 일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원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의 역사적 장면이나 원주민의 삶 같은 착하고 재미없는 주제들이 주로 그려졌습니다.
이런 점들이 정부주도하의 공공미술의 한계로 지적되기도 합니다. 비록 뉴딜 아트는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많은 예술가들이 이를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예술가로서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또 하나의 중요한 분야가 뉴딜 사진이 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의 농촌 등 열악한 상황을 사진으로 기록하여 해당 지역들에 대한 정부 지출이 필요함을 역설하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고용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도 많은 걸작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도로시어 랭의 "이주민 어머니"와 워커 에반스의 작품은 특히 유명합니다. 도로시어 랭의 작품은 감정을 강하게 전달하지만, 워커 에반스의 작품은 담담한 느낌을 줍니다. 이때 워커 에반스의 작품은 덤덤하면서도 동시에 삶의 고단함이 느껴질 수 있게 찍었기 때문에 존경받는 거장으로 인정을 받고, 그의 작품들도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담담하게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더 드라마틱하게 찍으라는 압력을 받았고, 결국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정부 지원 덕분에 뉴딜 아트의 걸작들이 탄생했지만, 정부주도의 한계도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며, 최근에도 도시 환경 개선을 위한 공공벽화 프로젝트 등 많은 프로젝트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뉴딜 벽화에서 영감을 받은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뉴딜 아트와 같은 예술 프로그램이 예술가들의 생계를 지원하는 역할을 충분히 수행한 반면, 공공벽화와 같은 일부 프로젝트는 예술가들의 재능 기부를 요구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점은 개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술이 과거 사회적 격변, 특히 경제적 어려움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또 이것이 어떻게 현대와 직결이 되어있는지 보셨을 것입니다. 시대를 앞서가며 사회적 변화와 격변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