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
안녕하십니까, 박정호입니다. 저는 오늘 인류의 역사를 무역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해보고자 합니다. 소주제는 '무역은 우리를 어떻게 발전시켜 왔는가'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대외 의존도가 매우 높은 국가입니다. 즉, 수출을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우리 경제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수출이나 무역, 통상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임에도 불구하고, 무역에 대해 정확히 알고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일반인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무역이 인류 발전에 어떤 기여를 해왔는지 살펴보고, 현대 사회에서 무역을 통해 어떤 국가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하나하나 설명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말씀드릴 내용은 비단길과 무역의 특성입니다. 무역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류 발전에 어떤 기여를 해왔는지를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비단길'입니다. 그래서 비단길을 바탕으로 무역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으로, 인류가 지금까지 발전해 오는 여러 경로에는 돈을 벌기 위한, 무역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해 변화된 것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노예 무역과 정크 무역을 통해 무역의 흐름을 아는 것이 우리 경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원천임을 설명드리겠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기술 발달과 기술의 표준화, 무역의 표준화가 무역 발전에 가장 진일보한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컨테이너 박스입니다. 컨테이너 박스를 통해 교역량의 변화를 진단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코로나19 이후 전개될 보호무역주의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지 하나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1. 비단길과 무역의 특성
먼저 비단길과 무역의 특성부터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비단길은 영어로 실크로드(Silk Road)라고 하며, 많은 분들이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비단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3~4가지 경로가 있다는 것도 아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비단길이 육로로 가는 비단길과 해로로 가는 비단길이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차이가 어떤 이유 때문에 생겼는지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역사적 흐름과 발전, 경제의 맥락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화면에서 보이는 내용이 대표적인 육로, 해로의 실크로드입니다. 가만히 보시면, 이 교역로가 지나가는 벨트를 쭉 살펴보시면 저기에 위치한 국가, 더 정확히 말하면 도시들이 지금도 세계적인 도시로 발달해 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어떤 나라가 경제적으로 부강해지거나 더 많은 부를 창출할 수 있느냐는 이처럼 전 세계 교역로, 무역로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요,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세계적인 도시들은 저 아래 파란색 줄로 표현된 상하이, 타이페이, 홍콩, 싱가포르, 카이로 같은 도시들입니다. 반면 붉은색과 노란색에 있는 이르쿠츠크나 우루무치 같은 도시는 요즘 들어 많이 들어보지 못한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왜 파란색 교역로에 있는 국가들은 여전히 부강하고 강성한데, 붉은색 도시들은 예전과 달리 잘 알려지지 않은 걸까요?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이는 비단길의 흥망성쇠와 무역로의 생로병사를 통해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 유럽인들이 비단길의 교역로를 발견하고 그 루트를 만든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비단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럽인들은 처음에 비단이 나무에서 자라는 것으로 오해했다는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비단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몰랐습니다. 따라서 유럽인들은 비단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중국으로부터 비단을 가져오면 고가에 판매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서 유럽으로 비단을 운반하려 했습니다.
중국에서도 비단은 고가로 판매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가의 비단을 우여곡절 끝에 유럽으로 가져오면, 유럽에서는 비단이 얼마에 팔렸을까요? 역사적 문헌을 살펴보면, 유럽에 도착한 비단은 중국에서의 구매 가격보다 100배 정도 비싸게 팔렸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상인들이 왜 목숨을 걸고 2억 만리를 넘어서 비단을 구하려 했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100배의 마진을 남길 수 있는 장사라면 누구라도 호기심을 가졌겠죠.
그래서 비단길은 이런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교역을 수행하려던 많은 상인들이 개발한 교역로였습니다. 당시 비단의 무게당 가치는 금보다 비싸거나 금과 유사한 수준이었고, 비단은 일부 부유층만 사용할 수 있는 옷감으로 유명했습니다. 거친 모피나 짐승의 털로 만든 옷을 입다가 가볍고 부드러운 비단을 맛본 유럽의 부유층들은 그 가격이 무엇이든 간에 다시는 무겁고 통풍이 잘 안 되는 모피를 두르지 않고 비단 옷을 입고 싶어 했습니다. 그로 인해 비단의 수요는 점점 늘어났지만 이를 공급할 상인은 많지 않았고, 그래서 비단은 계속 고가로 유통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실크로드는 육로길과 바다길 두 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처음엔 어떤 길로 주로 비단을 옮기고 나르고 했을까요? 당연히 육로였습니다. 2세기 한나라 시절에 처음 육로가 개척되었고, 중앙아시아의 대표적인 도시들을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는 육로를 통해 비단길이 개척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육로를 바탕으로 비단을 운반했던 이유는 큰 선단을 운영할 수 있는 기술적 인프라나 그런 해로를 구축하기에는 여의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인들은 낙타나 말을 이용해 최대한 많은 양의 비단을 실어 유럽까지 날라오는 육로를 선택했습니다. 이러한 육로를 통해 비단을 날리는 경로는 우루미츠나 이르쿠츠크와 같은 도시를 거쳐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대규모 선박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고, 다양한 금융제도와 금융 기법이 도입되면서 사람들은 대규모 선단을 조직할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대규모 선박을 운영할 수 있는 인프라가 조성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해로는 육로보다 저렴하고, 더 중요하게는 더 안전하며 빠르게 중국에서 유럽으로 비단을 운송할 수 있는 새로운 상황이 형성되었습니다. 이후 많은 유럽 상인들은 자신들의 자금을 모아 선박을 건조(建造)하고, 이를 이용해 바다를 건너 중국과 유럽을 오가며 해상 실크로드를 만들어갔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어떤 일이 생겼겠습니까? 한 번 왔다 갔다 하면 엄청난 수익을 확보할 수 있는 비단을 육로에 비해서 해로로 가면 많은 비단을 한꺼번에 선적해서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 다음 해로를 통해 왔을 때는 중간에 산적이나 도둑들과 같은 위험을 최대한 피할 수 있으며, 가장 빠르게 비단을 운송할 수 있습니다. 많은 상인들이 해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루무치나 울란바토르, 모스크바와 같은 도시는 경제적으로 위축되며, 반면 카이로, 싱가포르, 홍콩과 같은 세계적인 교역 항구 도시는 융성하고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교역로의 경제적 가치의 차이에서 유발되었습니다. 당시 해로를 통해 운송하는 교역 선의 규모는 점점 커졌으며, 길이가 50m에 달하는 크기의 선박도 구축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육로는 점점 위축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비단길에서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최근에는 수에즈 운하의 배가 좌초하여 전 세계 교역로가 막히고 그에 따라 주요 교역재들의 가격이 급등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많은 유럽의 국책연구기관들이 다른 교역로를 찾았으며, 그 중 크게 대두되고 있는 것이 바로 북극해 부근입니다. 사실 수에즈 운하를 통해 유럽과 동아시아 간 교역을 하기 위해서는 2만 킬로미터를 운항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북극해를 통하면 이동 거리가 1만 3천 킬로미터로 줄어들어 운송 비용이 40% 가까이 절감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러시아는 극동지역을 중심으로 경제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한국과 협력하여 동해안에 여러 교역로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역로의 선택과 경제적 수월성에 따라 전 세계 경제, 부의 흐름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것은 비단길의 당시 메커니즘이 요즘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2. 인류의 흑역사, 노예무역
우리 역사에는 여러 흑역사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저는 노예 무역을 꼽겠습니다. 노예 제도는 무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무역은 여러 흑인들이 오랜 기간 동안 비참한 처지에서 고통받게 된 주요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이제 하나씩 설명해 보겠습니다. 현재 화면에 보이는 것을 아시나요? 이것은 예전에는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던 고급 요리로,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먹어보고 싶어했던 음식입니다. 바로 프랑스 요리의 한 종류인 푸아그라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많은 시민사회 단체들이 이 음식을 인간이 먹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여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푸아그라는 거위 간을 사용하여 만드는 요리입니다. 최근에 이 요리에 대한 불매운동이 일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푸아그라를 얻기 위해 거위를 사육하는 과정에서 동물학대가 심각하다는 사실이 유튜브나 다양한 SNS 채널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거위 한 마리에서 큰 푸아그라 간을 얻기 위해 거위에게 반강제적으로 특수 사료를 먹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 사료는 거위의 입을 벌려서 목이 아닌 위로 직접 삽입한 후, 간을 비대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지방을 최대한 채우기 위해 과도하게 사용됩니다. 이러한 사육 방식이 여러 곳에서 SNS를 통해 공유되어 왔습니다.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거위를 먹이는 것은 동물에 대한 학대라고 판단하여 푸아그라에 대한 불매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초창기 불매운동 중 하나를 꼽으라면 저는 설탕에 대한 불매운동을 꼽습니다. 이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로부터 인류는 단맛을 얻기 위한 여정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단맛을 낼 수 있는 향신료를 구하기 어려웠던 인류의 교역 역사는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노력의 연속이었습니다.
과거에는 벌꿀이나 메이플 시럽과 같은 자연의 단맛을 얻는 방법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겐지스강 델타와 아셈 지역에서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사탕수수를 먹게 되면서 단맛의 새로운 원천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탕수수가 재배되기 시작하며 단맛을 제공하는 중요한 작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사탕수수를 효율적으로 재배하여 유럽 시장에 공급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도중 신대륙에서 대규모 설탕 생산이 시작되면서 부유층 뿐만 아니라 중산층도 설탕의 맛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설탕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유럽인들은 설탕을 판매하고 돈을 벌기 위해 사탕수수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지역인 중남미에서 다양한 농장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들어서면서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높은 열량을 얻을 수 있는 대표적인 수단으로 설탕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설탕 수요는 더욱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한 가지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에게는 먹을 거리 대신 고칼로리 설탕을 주어 근로를 강요하는 형태로 설탕이 사용되었지만, 설탕을 재배하기 위해 다시 더 많은 노동자들이 필요해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탕수수를 설탕으로 정제하는 과정은 매우 노동 집약적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한 저널리스트가 한 말처럼, 설탕 1파운드를 소비할 때마다 사람의 살 2온스를 먹는 것과 같다는 비유가 있을 만큼, 설탕의 정제 과정은 많은 근로자들의 희생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로 활용된 노동자들은 누구였을까요? 당연히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었으며, 이들은 아프리카 지역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이주되어 사탕수수 농장에서 활용되었습니다.
그 시대의 여러 문헌 작품들은 아프리카 노예들의 모습을 참혹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작품은 너무 참혹해서 더 이상 읽을 수 없을 정도의 비유적 묘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들 노예들은 설탕수수 농장에서 쉬지 못하고 노역을 하였고, 게다가 설탕수수는 매우 더운 날씨에서 재배가 되었기 때문에 노예들은 피부 전체에 1도 또는 2도 이상의 화상을 입어가며 일했습니다. 그들은 물집이 다 잡힌 상태에서 일을 하며, 식량 부족과 각종 전염병에 노출되어 온몸이 물집으로 부풀어 오르고 마른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중남미 지역의 흑인 노예들의 모습들이 묘사되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흑인 노예들을 중남미로 잡아와서 노예로 이용할 수 있는 기간이 불과 10년도 안 되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10년도 안되어서 흑인 노예들이 사망하거나 쇠퇴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유럽인들은 새로운 흑인 노예를 계속해서 가져오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러한 실상이 유럽 각지에 널리 알려지고 수탈의 정도가 더욱 심해지면서, 이를 개선하기 위한 시도로 여러 법안이 마련되어 흑인 노예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이 입법화된 국가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큰 이득을 챙기는 상인들은 이 법을 우회하며 여전히 흑인 노예를 사용했고, 이러한 법은 실질적으로 집행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소비자들에서 찾아졌습니다. 설탕에 대한 불매운동이 시작되었고, 이는 1786년에 토머스 클라크슨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논문상을 받은 "노예제와 인간 매매론" 논문을 통해 설탕의 정제 과정에서 인권유린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널리 알림으로써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토마스 클라크슨은 설탕에 대한 불매운동의 중추적 인물이었고, 그의 이 논문은 노예제 폐지 운동을 유럽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남는 점이 있습니다. 유럽인 지주들은 중남미 농장을 운영하기 위해 이주한 소수였는데,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흑인 노예가 강제로 끌려오게 된 것입니다. 이 노예들은 유럽인 지주에 비해 절대 다수였을 것인데, 그들은 왜 이런 불공정한 처지를 몇 세기 동안 견뎌내야 했을까요? 이에 대한 경제학적 설명이 많이 있습니다.
정답은 합리적 무지라는 겁니다. 아마 그 흑인 노예들 중에서는 누군가는 "우리들, 그러지 말고 단합해서 연대해서 저 백인 지주들의 불편부당함에 항거하자"는 주장을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먼저 자기가 총대를 메고 저항하거나 불평을 토로하기 시작하면, 아마 그 사람은 정말 엄청난 몸에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수준까지 뭔가 체벌을 당하거나 어떤 형벌에 처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게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이 되느냐" 하면, 나 혼자 나서서 항거하는 순간 모든 위험은 혼자 감내해야 되는 상황에서 못 본 척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이 바로 행동 경제학에서 저들이 왜 저 당시에 소수의 백인 지주들에게 항거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경제학은 어떤 역사적 맥락뿐만 아니라 그 역사적 현장에서 왜 그들이 그러한 의사결정을 하게 됐는지까지도 진단하는 데 굉장히 유용한 학문입니다.
자, 마저 계속 얘기를 드리면요. 이런 인류의 가장 큰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흑인 노예 무역. 그래서 지금 중남미, 서인도 제도라든가 중남미 많은 국가들에서는 대표적 인종이 흑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나라가 참 많죠. 그 당시 얼마나 많은 인구가 중남미 지역으로 이주해 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지금도 여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불편부당한 흑인 노예 무역과 같은 불공정한 교역, 이런 것들이 요즘은 중단되어 있는 상황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도 여전히 공정한 무역과 교역의 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는데요. 유엔에서는 지속 가능한 발전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목표로 하여 전 세계 많은 국가들에게 17가지 아젠다에 참여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페어 트레이드, 공정무역입니다. 이 공정무역은 말 그대로 교역을 통해 얻는 부가가치를 특정 국가가 독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교역에 참가하는 모든 국가가 골고루 나눠가지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요즘 페어 트레이드로 대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상품을 꼽으라면 커피입니다. 커피는 저개발 국가의 커피 농장에서 재배됩니다. 그런데 이 커피는 1kg당 진짜 원가를 따지면 몇 불 되지 않는 수준으로 매우 저렴합니다. 실제로 1불도 안 되는 곳도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세계적인 커피 체인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은 매우 비싼 가격에 판매됩니다. 커피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가가치가 글로벌 대기업에 너무 집중되는 것은 문제가 아닐까요? 바로 이런 문제의식 아래에서 공정한 무역을 통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공평하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자는 것이 유엔에서 공정한 무역, 페어 트레이드를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입니다.
#3. 한국의 대기업을 만든 정크무역
자, 무역의 발전은 세계 여러 역사적 사례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한 나라 또는 인류의 발전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이러한 무역 발전의 중요성을 경험했습니다. 특히 정크무역이라는 개념은 한국의 산업 구조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현재 한국의 대기업을 만든 것이 정크무역이라고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945년 해방으로 독립의 기쁨을 누렸지만 경제적으로는 오히려 큰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당시 생활용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과 노하우는 주로 일본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은 우리나라에 전달되지 않고, 자국 내의 고유한 영역으로만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일본 기업의 지배 아래에서 일을 하게 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우리나라가 해방되면서 일본 기업들은 급작스럽게 자국으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국민들이 생활하는 데 사용되던 많은 생필품들이 일순간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국내 산업 시스템이 일순간 마비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러 생필품의 가격은 급등하게 되었고, 민생 경제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일제시대에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보직들은 주로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없는 상황에서 남은 유휴공장을 가동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제조업 자본의 90% 이상이 일본 자본이었고, 제조업 분야의 전문 기술자의 80% 이상이 일본인이었습니다.
또한, 해방 후에도 남과 북이 분단되면서 한 가지 더 어려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남한은 농업 중심지, 북한은 공업 중심지로 산업 구조가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분단 이후 남북 간의 교역이 원활하지 않게 되면서 남한이 필요로 하는 여러 상품들을 북한으로부터 공급받지 못해 생필품 부족 현상이 심각해졌습니다.
한국의 이러한 상황에 주목한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칭다오 등 중국 연해 지역 도시에 거주하는 상인들로, 상대적으로 공산품을 원활히 조달하고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는 노하우와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해를 넘어 한국에서 이 공산품을 판매하면 몇 배 비싸게 팔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상인들은 다양한 공산품을 싣고 서해를 건너 인천항에 도착하여 생필품을 공급해주는 선단을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선단을 정크무역을 하는 선단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중국 상인들이 교역에 사용하기 시작한 배들은 현재의 무역선처럼 동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노를 저어 서해를 건너는 그런 배였습니다. 그래서 외국인들은 이 배들을 보고 '저게 무슨 배지? 정말로 쓰레기 같다'라고 생각했고, 정크(Junk)라는 말로 그 배들을 묘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크선 혹은 쓰레기선을 이용한 무역이라는 의미에서 정크무역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 정크무역의 형태를 조금 더 살펴보면, 무동력선에 물건을 싣고 와서 한국과 교역을 하기 시작한 중국 상인들이 인천항을 통해 공산품을 제공하기 시작하면서 인천항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교역로로 성장하게 됩니다. 당시 중국에서 인천으로 물건을 가져오면 10배 가까운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중국 각지에 알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의구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해방된 지 얼마 안 된 신생국에 해당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생국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매할 때 과연 무엇으로 대금을 지급했을까요? 현재 전 세계에서 교역할 때 가장 흔히 사용하는 통화는 미 달러나 유로화와 같은 기축 통화들입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는 달러가 많지도 않았고, 우리나라 자체 통화는 중국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그 당시 교역에 사용했던 대표적인 지불수단은 무엇이었을까요? 놀랍게도 20세기 1940년대에 우리나라가 교역을 하는 방식은 ‘물물교환’이었습니다. 당시 중국 상인들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농산물, 생필품, 공산품을 인천 항구에 내려놓고, 그것에 대한 대금으로 우리나라에서 자체적으로 생산(조달)할 수 있는 오징어, 새우, 미역 등과 같은 해산물과 일부 광물 자원을 받아갔습니다. 이들은 생필품을 내려놓은 빈 배에 오징어, 새우, 미역, 광석 자원을 싣고 중국으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무역을 수행했습니다. 저도 여러 역사적 문헌을 바탕으로 연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20세기에도 물물교환을 통해 교역과 거래를 했다는 자료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상당한 시세 차익을 얻을 수 있는 교역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 마카오, 홍콩 상인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면서, 1947년 3월에는 처음으로 인천항에 마카오 무역선 페어리드호가 도착했습니다. 이 배는 2천 톤급으로 굉장히 큰 선박이었는데요, 그동안 무동력선으로 교역만 했던 인천항에 2천 톤급 배가 선적하게 되면서, 당시 인천항이 얼마나 큰 돈이 거래되었고, 큰 돈을 벌 수 있었던 교역 항구였는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홍콩에서는 생고무, 제지, 생필품을 비롯한 다양한 잡화를 국내로 수출했고, 그 대금으로 중석, 아연과 같은 지하자원, 그리고 오징어, 새우, 해삼과 같은 해산물로 대금을 받아간 기록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정크무역이 우리나라 대기업의 효시가 되었다고 말씀드렸었죠? 그럼 그것이 어떻게 된 걸까요? 다시 당시 인천 상인들의 모습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인천을 근거로 활동했던 상인들은 중국 상인으로부터 물건을 사다가 한국 내륙 지방에 전달해주면, 다시 10배 이상의 시세 차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대전이나 충주, 강원도와 같은 내륙지역은 인천에서 멀기 때문에 물자가 더욱 귀했습니다. 따라서 인천에서 중국 상인들로부터 물건을 산 다음, 내륙지방에 팔면 또다시 10배 이상의 큰 이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때 인천지역을 바탕으로 크게 번성하기 시작한 여러 회사들이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회사가 한진상사입니다. 한진상사의 설립자는 미군부대 트럭을 사다가 인천항에서 산 물건을 내륙지방까지 배송해주거나 직접 판매하면서 엄청난 수익을 거두었습니다. 바로 이 한진상사가 현재 한진그룹과 대한항공의 모태가 된 회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구 지역에서 큰 돈을 벌었던 이병철 회장 역시 인천항구가 적지 않은 기회를 제공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구의 사업을 청산하고 수도권으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이는 인천항을 바탕으로 한 비즈니스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었죠. 이때 이병철 회장은 삼성그룹의 대표적인 회사에 해당하는 삼성물산을 설립하여 인천항에서 수급받은 많은 물품을 대구 지역 등 내륙 지역에 전달하면서 물류 유통업을 수행했습니다. 이를 통해 현재의 삼성그룹을 만드는 중요한 시드머니를 마련했습니다. 이처럼,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많은 회사들이 인천항 근처를 거점으로 성장해왔습니다. 이는 당시 정크무역이 이들에게 큰 돈을 버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4. 무역 활성화의 1등 공신, 컨테이너
최근에는 무역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그 1등 공신은 단연코 컨테이너입니다. 과거에는 항구도시에서 많은 상인들이나 선원들이 한달씩 머무는 것이 통상적이었습니다. 이는 많은 무역 물품의 규격이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배에 싣고 내리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기계가 아닌 사람들이 직접 수행했습니다. 그래서 과거 무역항 근처는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교역의 메카였는데요, 이렇게 항구에 정박할 때마다 한 달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전 세계 교역이 발달하는 데 커다란 장애 요인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인식했습니다.
이런 병목 현상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컨테이너 박스에 교역 물품을 모두 넣고 컨테이너 박스만 나르는 방식을 활용한다면 훨씬 더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전 세계 교역의 표준 규격은 컨테이너 박스를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5천 톤급 뿐만 아니라 그 이상 되는 대형 컨테이너 선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요, 그 과정에서 과거에 구축된 수에즈 운하가 좁아져서 배가 좌초되는 일까지 목격할 수 있을 만큼 컨테이너 교역량은 나날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5. 보호무역의 역사
자, 이렇게 무역량이 점점 더 늘어나는 과정에서, 최근 전 세계 교역 현장(무역 현장)은 과거와는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보호무역주의가 다시 대두될 것으로 진단하거나 우려하고 있는데요, 보호무역주의는 관세나 통상 장벽 등을 통해 국가 간 교역의 흐름을 제한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호무역 수단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은밀하고 교묘하며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 왔습니다. 마지막 코너에서는 보호무역주의의 역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표적인 보호무역의 역사를 꼽을 때, 제가 자주 언급하는 나라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프랑스입니다. 프랑스를 보호무역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 이유는, 자국 산업을 지키기 위해 사용했던 방식 때문입니다. 198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 가전시장은 일본이 제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본이 전 세계 가전시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국내의 많은 가전 회사들이 좌초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의 가전 회사들을 어떻게든 지켜내기 위해 일본 가전제품의 국내 수입을 차단해야 했습니다. 그때 프랑스 정부가 선택했던 방식이 바로 보호무역주의였습니다.
프랑스는 그 당시 어떻게 했을까요? 일본의 가전제품이 입항할 수 있는 항구를 프랑스 전체에서 한 항구로만 지정해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그 항구에 파견되는 세관 공무원을 딱 한 명만 배치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일본의 가전제품이 프랑스 항구에 도착했지만, 그 항구에서 통관 절차를 거쳐 프랑스 내륙으로 들어가는 데 매우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통상적으로 6개월에서 8개월 가까이 지연되었다고 합니다. 배는 진작에 그 항구에 도착해서 물건을 선적해 놨는데, 세관 공무원이 한 명밖에 없어서 그 공무원의 통관 절차를 거쳐 내륙으로 들어가는 데 무려 반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신제품이 하루아침에 신제품이 아닌 상태로 내륙으로 들어가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처럼 보호무역주의는 관세를 부과하거나 반덤핑 제재를 가하는 등의 눈에 보이는 수단뿐만 아니라, 세관 공무원의 배치나 입항할 수 있는 항구에 대한 규제 같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도 전개될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국제무역기구에 프랑스가 우리의 교역을 억제하고 있다는 여러 가지 클레임을 걸었지만, 프랑스 정부는 "우리나라 공무원을 어디에 몇 명 발령할지는 우리의 주권에 해당되는 것이다. 일본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는 논조로 답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보호무역을 위해 도입했던 방안 하나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지금 화면에 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콘센트죠. 이스라엘은 자국의 제조 거점을 지켜내기 위해 ‘콘센트’를 활용했습니다. 전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 보면 콘센트 모양이 다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하셨을 겁니다. 어렸을 때 사용했던 110V를 비롯해, 흔히 말하는 돼지코 모양, 네모난 사각형 모양의 플러그 등 다양한 형태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에서 가장 특이한 콘센트를 사용하는 나라를 하나 꼽으라면, 이스라엘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콘센트는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사용하지 않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이렇게 독특한 콘센트를 사용할까요? 바로 자국의 제조 거점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은 인구가 워낙 적어 견실한 제조업이 성장할 수 있는 내수시장이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스타트업 기업들이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내면, 이를 내수시장에서 테스트하고 시판해본 다음, 괜찮다고 판단되면 실리콘밸리, 베를린, 런던 등에서 국제 자금을 통해 창업하여 전 세계에 제품을 출시하는 것이 통상적인 이스라엘 스타트업의 전략입니다. 그런데 내수시장을 이스라엘 스타트업들이 자신의 제품을 시연할 수 있는 기회의 장으로 고스란히 남겨두고자 한다면, 외국 기업들이 이스라엘에 들어와 활동하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겠죠. 그 막는 수단 중 하나로, 이스라엘만 사용하는 독특한 콘센트 모양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LG나 삼성이 이스라엘에 자사의 제품을 출시해 판매하려고 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할 물건을 납품하려고 했더니, 이스라엘에서 물건을 팔려면 콘센트를 독특한 형태로 바꿔서 제품에 다시 장착해야 했습니다. 많은 글로벌 플레이어들이 이러한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면 많은 의문(Question mark)이 들 겁니다. 이스라엘이 큰 내수 시장을 가진 중국과 같은 시장이라면, 기꺼이 콘센트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도 바꿔서라도 그 시장에 진출하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수 시장이 크지 않은 이스라엘에 콘센트까지 새로 주조해서 만들어 제품에 부착해 판다? 이는 상당히 고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이스라엘은 외국 기업들의 자국 시장에 대한 관심과 매력을 떨어뜨리고, 이스라엘 내부의 스타트업들이 이스라엘을 기반으로 다양한 시범 테스트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이러한 독특한 콘센트 모양을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남다른 콘센트 모양으로 보호무역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보호무역의 역사 중 한 가지 흥미로운 사례를 가져왔습니다. 바로 생수시장입니다. 원래 우리나라는 마시는 생수를 돈을 주고 사고 파는 것이 불법이었습니다. 마시는 물까지 돈을 주고 사 먹는 것은 사회적 위화감을 일으킬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몇 번 생수시장이 열릴 뻔했지만, 법으로 금지되었던 것이 예전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당시 많은 관료들은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국에 대거 방문하게 될 텐데, 이들에게 물건을 팔아 외화를 벌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외국인들에게 추가로 판매할 수 있는 물건이 무엇일까 고심하던 중, 해외 유학을 다녀온 석학들이나 관료들이 외국에서는 마시는 물도 돈을 주고 사서 먹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합니다. 그래서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마시는 물을 돈을 주고 사고 팔 수 있도록 법을 바꾸는 제도가 드디어 입법 예고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정부는 생수시장에 진출할 많은 중견기업들이 누가 있을지 사전에 간담회를 열어 의견을 조율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생수시장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기업들의 요구가 있었습니다. 그 요구는, 생수를 만들어 파는 것도 적지 않은 노하우와 인프라가 필요한데, 우리나라 생수시장을 그냥 오픈하면 글로벌 생수 브랜드들이 우리나라 시장을 잠식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기업들이 국내 생수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외국 기업들이 국내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정책 입안자들은 어떻게 하면 외국 기업이 국내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 우리 기업들이 생수시장에서 성과를 낼 수 있는 시장을 만들어줄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때 통상적으로는 관세를 부과하거나, 또는 추가적으로 외국 생수의 통관 절차를 막는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88 올림픽이 앞두고 있던 시기에 외국 제품은 막고 자국 제품만 외국인들에게 판매한다는 결정이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보도되면 우리나라도 상당한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었겠죠. 따라서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관세를 부과하거나 이와 같은 방법들을 선택할 수 없었고, 그래서 우리는 보호무역을 위한 전략으로 유통기한을 도입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현재도 국제사회에서는 세 가지 물품에 대해 유통기한을 굉장히 관대하게 부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바로 소금, 설탕, 그리고 생수입니다. 소금은 원래 광물로 분류되지만 일부는 식품으로도 유통됩니다. 소금이나 설탕은 썩거나 부패하지 않기 때문에 유통기한을 상당히 길게 설정할 수 있는 것이 통상적입니다. 마시는 물도 밀봉이 제대로 되어 있다면 잘 부패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유통기한을 넉넉하게 설정합니다.
그러나 88 올림픽 즈음에 우리는 생수 시장을 개방하기 시작했고, 이 때 법적으로 허용된 생수의 최대 유통기한을 6개월로 제한했습니다. 이로 인해 다국적 생수 회사들은 한국 시장 진입이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자신들이 생수에 붙어 있는 2년이나 3년과 같은 긴 유통기한 라벨을 다 떼고 6개월짜리 라벨을 다시 붙이기도 어려웠으며, 만약 한국에 배를 선적했는데 6개월 안에 소진되지 않으면 다시 회수하거나 폐기해야 했기 때문에 비용 문제도 크게 발생했습니다. 이렇게 식품 안전을 명분으로 생수의 유통기한을 단기적인 6개월로 제한함으로써 우리나라 생수 시장은 국내 기업에게 유리하도록 구축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조치 덕분에 현재도 외국 생수가 우리나라에서 큰 점유율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기업들이 생수 시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런 보이지 않는 보호무역 전략을 적절히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코로나19 이후 많은 나라에서 자국의 내수 기업들을 활성화시키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보호무역주의를 선택하는 국가들이 점점 늘어날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무역의 역사와 보호무역주의 등 무역의 다양한 실질적 양상을 꼭 알아야 하는 이유는 코로나19 이후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기초 상식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인류 역사와 무역을 통해 미래를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 기회에 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