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은소식 24.1월호 ‘화폐이야기’ 코너 >
간식을 위한 따뜻한 천원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필자는 한 프랜차이즈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신용카드로 결제할지 애플페이로 결제할지 고민한 적이 있다. 얼마 전 남대문시장에서 호떡을 사먹을 때는 계좌이체를 한 적도 있다. 한국은행에서 근무하며 은행이 현금 입금을 받지 않는다는 민원 전화를 받고, ‘현금사용선택권’ 홍보 활동을 담당하는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정작 일상에서는 현금결제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디지털 지급수단 사용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현금에 대해서는 자주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신용카드를 이용한 결제가 보편화되었고, 삼성페이, 네이버페이 등 각종 모바일 지급수단이 등장하는가 하면, 얼마 전에는 애플페이가 한국에 출시되면서 아이폰 이용자들도 더 이상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거리에는 현금을 받지 않는 소위 ‘인스타 감성’ 카페나 상점들의 수가 많아졌고, 서울을 비롯한 지자체에서는 ‘현금 없는 버스’를 운영하며 대중교통에서도 현금 사용이 어렵게 되었다. 그럼에도 몇몇은 여전히 현금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일상에서 현금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퇴근 후 침대에 누워 유튜브 쇼츠를 보던 필자는 영국의 한 현금 없는 가게에서 한 노인이 “나는 법화(Legal Tender)로 지불했다”며 저지하는 직원을 당당하게 뿌리치는 영상을 보았다. 필자가 당행 외국어 연수를 하며 이야기하게 된 미국과 프랑스 사람들은 디지털화폐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며 현금의 중요성을 어필하기도 했다. 추운 겨울날 필수 간식인 붕어빵과 호떡을 파는 포장마차의 상인분들도 아직 현금을 봉투에 쌓아두며 거래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현금을 사용하는 것일까. 경제학도들은 케인스가 정립한 화폐수요의 세 가지 동기인 거래적, 예비적, 투기적 동기를 기억하겠지만, 디지털 지급수단이 일상인 현대인들은 조금 더 구체적인 동기를 가진다.
먼저 사람들은 소비 지출을 관리하기 위해 현금을 사용한다. 얼마 전 영국 금융협회(UK Finance)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영국의 현금결제 거래 건수는 전년에 비해 상당폭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이러한 현상이 高인플레이션 시기에 사람들이 소비 지출을 관리하기 위해 현금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물가가 급격히 올라 실질 임금이 감소하자 영국 사람들은 일정 금액의 현금을 인출해 두고 보유한 범위 내에서 소비 지출액을 관리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기사에서는 카드를 사용하는 대신 현금을 인출한 후 바인더에 사용 목적별로 분류하여 소비하는 이른바 ‘현금 챌린지’가 일부 대학생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이야기가 실렸다. 올해 초 미국에서 잠시 유행한 적이 있는 챌린지였는데, 물가가 많이 오른 한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현금 사용이 증가한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 영국, 유럽 등 주요국의 자료를 분석한 한 연구에서는 1999년 Y2K 사태,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 주요국의 GDP 대비 화폐발행잔액 비중이 급격하게 상승한 것을 보여주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결제 시스템이나 금융기관의 안정성에 의구심이 들 때 현금을 보유하여 혹시 모를 비상 상황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은행 또한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급격히 증가한 민간의 현금 수요에 대응해야 했다. 지폐를 통해 코로나가 전염된다는 등 별의별 괴담이 떠도는 시기였지만, 의외로 현금을 보유하고자 하는 시민들은 많았다. 외국의 사례와 비슷하게 범사회적 비상 상황에 대비한 예비적 목적의 현금을 보유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끔은 비현금 결제 시스템이 장애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올해 추석 연휴 중에는 신한카드의 인증서 만료로 몇 시간 동안 결제가 불가능한 사태가 발생했다. 지난해 SK C&C 데이터센터 화재 때는 카카오의 서버가 영향을 받아 대표적인 간편결제 시스템인 카카오페이가 먹통이 되었다. 디지털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컴퓨터 시스템에 많은 신뢰를 부여하고 있지만, 컴퓨터는 생각보다 예민하고 사소한 충격에도 작동 불능이 되곤 한다. 이러한 비상 상황에서 현금은 디지털 지급수단보다 훨씬 유용하다.
이처럼 다양한 이유로 우리는 현금을 보유하려고 한다. 비록 디지털 결제가 계속 확산되고는 있지만, 그 시스템이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급결제 시장에서의 현금이 내는 목소리가 줄어들고 있지만, 테이블에서 의자를 아예 뺏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편 최근 수 년간 비트코인을 비롯한 암호자산, 전자화폐 등 디지털화폐 사용이 확대되며 ‘현금없는 사회’에 대한 논의도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현금 사용을 선호하는 일부 금융 소외계층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의를 차치하더라도, 위에서 보듯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이유로 현금을 필요로 한다.
또한 사람들은 아직 디지털화폐와 친숙하지 못하다. 금융시스템에 의한 통화창조는 결국 중앙은행 화폐인 법화에 기반하기 때문에 미래에 현금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디지털화폐를 다룬 뉴스 기사나 영상의 댓글을 보더라도 사람들은 전자지갑의 해킹 가능성, 사용기록 노출로 인한 사생활 침해 등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시민들은 설과 추석 명절에 빳빳한 새 돈을 봉투에 담아 선물로 주고받는 것을 선호하고, 아이들에게도 현금으로 용돈을 주는 것이 어린 나이부터 경제 관념을 키우는 데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당분간 친숙한 현금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중앙은행의 가장 오래된 역할은 법화의 발행이기도 하다. 추운 경제 상황을 녹여주는 따뜻한 붕어빵 같은 포용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이때, 중앙은행 직원인 우리도 현금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화폐연구팀 유영서 조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