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이야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

[´丙´십원권, 1946.5.6 발행] [무궁화 꽃이 핀 ´丁´백원권, 1946.7.1 발행]
무궁화(無窮花)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꽃이다 . 술래가 된 아이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는 사이에 나머지 아이들이 한발한발 술래에게 다가가는 친숙한 모습이 우리들 가슴속에 있듯 무궁화는 늘 우리들 곁에 있어 왔다. 1907년 윤치호 선생은 애국가 후렴에 무궁화를 썼으며 1925년 10월 25일 동아일보는 ´조선 국화 무궁화의 내력´이라는 글을 통해 무궁화에 담긴 우리의 정서를 밝힌 바 있다. 또한 도산 안창호 선생은 무궁화를 국화(國花)로 주창(主唱)한 바 있으며 남궁억 선생은 ´무궁화 보급운동´ 등으로 전국민이 무궁화를 국화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온갖 힘을 쏟으셨다.
그러나 우리의 국화인 무궁화가 화폐의 도안으로 채택되어 우리의 돈임을 강하게 심어준 것은 1946년 7월 1일부터이다. 이 때야 비로소 우리나라의 은행권(지폐)에 무궁화 꽃이 피게 되어 조폐(造幣)의 자주권이 우리 대한민국에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한일합방이후 1년만인 1911년 조선은행법의 공포를 시작으로 우리의 화폐발행 및 조폐권을 빼앗아 해방전까지 20종의 조선은행권을 만들었다. 이때 만들어진 조선은행권의 대부분은 앞면도안의 주소재가 수노인상(壽老人像, 구한말의 석학이자 문장가로서 87세까지 장수한 김윤식의 초상으로 알려지고 있음)이나 일본정부의 휘장인 오동문장(梧桐文章)을 보조 도안소재로 사용함에 따라 일제의 조폐권 침탈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게 하였다. 한편 1945년 해방후에도 군정법령(軍政法令)에 의해 조선은행법의 존속과 더불어 조선은행권이 그대로 유통됨에 따라 인쇄처가 종전 일본내각인쇄국(日本內閣印刷局)에서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朝鮮書籍印刷株式會社)로 바뀌었을 뿐 1945년 8월 15일 ´乙´百圓券,1946년 5월 6일 ´丙´拾圓券(위 사진 왼쪽)에 이르기까지 종래 일본정부 휘장인 오동문장이 그대로 인쇄되어 우리의 무궁화는 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1946년 7월 1일 종래 일본정부 휘장의 오동문장을 무궁화 도안으로 바꾼 ´丁´百圓券(위 사진 오른쪽)은 비록 작은 변화이지만 우리나라 화폐사에 일본 색을 없애고 조폐권의 국가적 자주성을 회복하였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해방이후의 몇몇 한국은행권, 현용 1원화, 1998년 8월 14일 발행된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주화에 이르기까지 무궁한 번영을 상징하는 무궁화가 이어 피고 있음이 3.1절이 속한 3월에는 더욱 뜻깊다 하겠다.
<송창근 / 발권과 행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