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는 그림 소재가 있듯이 은행권(지폐)에는 은행권 도안 소재라는 것이 있다. 현용 만원권의 경우 도안 소재는 앞면의 ‘세종대왕 초상’과 뒷면의 ‘경회루 전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부터 지금까지 50여년간 44종류나 되는 많은 종류의 ‘한국은행권’이 발행되었는데, 이들 은행권의 도안 소재를 시대별로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 초창기에 해당하는 1950년 이후 1962년 화폐개혁 이전까지 발행된 21종류의 은행권에는 ‘대한민국의 독립 또는 건국을 상징하는 도안 소재’가 주로 이용되었다. 이 시기의 지폐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 초상, 광화문, 탑골공원, 거북선, 독립문, 무궁화(한국은행 휘장) 등이 등장한다. 이승만 대통령 초상의 경우 1960년 초반까지 ‘건국의 상징’으로 각종 은행권에 단골로 등장하였다. 1960년 4.19 혁명 이후에는 새로운 경제질서 확립을 상징하는 뜻에서 세종대왕 초상(천환권, 오백환권)과 모자상(母子像, 백환권)으로 대체되었으나, 1962년 6월 10일에 단행된 제2차 화폐개혁으로 오래 사용되지 못했다.

제2차 화폐개혁으로 500원권, 100원권, 50원권, 10원권, 5원권, 1원권, 50전권, 10전권 등 8개 권종이 새로 도입되면서 은행권 도안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화폐개혁 이후 발행된 은행권에는 상당기간 동안 인물초상 대신에 숭례문, 독립문, 해금강 총석정, 경회루, 탑골공원, 첨성대, 거북선 등 건축물 또는 자연환경과 관련된 도안만이 채택되었다. 다만, 1965년 발행된 100원권의 앞면에만 예외적으로 ‘세종대왕 초상’이 등장한다.
1972년 이후 그동안의 급속한 경제발전에 따른 거래 규모 확대와 물가 상승으로 새로운 고액권이 필요해짐에 따라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오천원권, 만원권, 천원권 액면이 새롭게 도입되고 오백원권의 도안도 바뀌면서 은행권 앞면에는 세종대왕, 율곡 이이, 퇴계 이황, 충무공 이순신 등 선현의 초상이, 뒷면에는 ‘그 선현과 관련성이 높은’ 근정전, 경회루, 오죽헌, 도산서원, 현충사 등의 건축 문화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초 만원권에는 석굴암 여래좌상을 도안소재로 사용하려 하였으나 사회 일부에서 정부가 특정 종교를 두둔한다고 문제를 제기함에 따라 세종대왕 초상으로 바뀌었다.

화폐 도안에는 그 시대의 가치를 잘 나타낼 수 있는 소재가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은행권의 도안 소재는 1970년대 초반에 채택되어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견이 많다. 즉, 우리나라의 은행권 인물 초상이 모두 ‘조선시대 사람’으로서 ‘이(李)씨’ 성을 가진 ‘남성’ 일색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사람의 가치관도 바뀌는데 그간의 우리 사회의 변화 등을 감안하여 볼 때 다양한 성(姓)을 가진 인물 외에도 여성 초상도 도안 소재로 채택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발권정책팀 차장 나승근, 2004. 9. 1일 [한국일보]“화폐속세상”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