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적 기대가설에 의하면 모든 경제주체는 동질적으로 미래 상황을 예측한다. 따라서 자산가격의 기대수익률은 현재의 가격에 경제주체들의 예상이 모여 형성된 기댓값이 더해져 산출된다. 이와 같이 예전의 경제이론들은 인간의 합리성과 기대의 합일을 전제로 진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비합리성과 불완전한 심리상태가 경제 현상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행태경제학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20세기 심리학에서 최고의 발견은 저명한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이 주창한 ‘ABC룰’이라고한다.예전에는인간의 심리가 A(Adversity,역경)에서 C(Consequence, 결과)로 곧바로 이어진다고 보았다면 이제는 A에서 B를 거쳐 C로 연결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여기서의 B는 ‘Belief’ 즉 개인의 신념을 말한다. 그는 상황 그 자체를 바꾸려는 대신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통로인 개인의 신념을 바꾸려는 노력을 처음 시도하였다. 그의 노력은 긍정 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결과를 맺어 ‘시크릿’ 등 자기개발서의 이론적 모태가 되었다.
2000년에 제작되어 호평을 받은 영화 을 보면 쿠바 미사일 사태 당시 13일 동안 백악관의 긴박한 정황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미군 정찰기가 우연히 미국의 앞마당인 쿠바에 소련제 핵탄두가 배치된 것을 확인하고 미국은 해양 봉쇄를 통해 이에 대응한다. 해양 봉쇄 당시 누구든지 먼저 발포를 하면 3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영화 도중에 케빈 코스트너(케네디 대통령의 정책 보좌관)가 쿠바 상공 정찰 도중 쿠바 군인들에 의해 총격을 당한 조종사에게 상황 보고 시 총격은 없었다고 말하라고 지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만약 상대방이 먼저 공격했다는 사실을 미국 강경파들이나 대중들이 알게 된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전쟁으로 치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조작 사실이 드러나는 경우 더 많은 혼란과 분노를 야기할 수 있었고 앞으로 그들이 감내해야 할 상황은 처음부터 사실대로 언급했던 경우보다 더욱 악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전략은 성공적이었고 결과적으로 전 세계는 3차 세계대전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된다.
앞에서 언급된 사례들은 모두 ‘기대’ 와 관련이 있다. 경제주체들의 합리적 또는 비합리적 기대가 모여 가격을 형성하며 사람들은 자신의 심리에서 파생된 기대에 따라 자신의 상황을 규정하고 앞으로의 행동을 구상한다. 또한 에 의하면 그러한 기대를 조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전쟁을 막는 성과를 거둔다. 실제로 사람들은 사실(fact) 그 자체를 보기보다는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본다. 즉 자신의 기대와 신념에 의해 걸러진 사실을 보고 기뻐하고 평가하고 분노한다. 경제도 기대에 따라 행동하는 경제주체들로 구성되어 있는 유기체이므로 ‘기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실제로 가계나 기업의 의도와 판단, 전망 등을 지수화한 경제심리지수(ESI)가 경제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있어 중요한 참고수단이 된다. 우리나라 채권시장도 미국의 정책금리가 언제 상승할 것인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운다. 심지어 일부 영향력 있는 언론에서 금리 상승시기를 예측만 해도 채권시장은 요동친다. 정보는 순식간에 퍼지고 이러한 정보들은 빠르게 일치된 기대를 형성하며 이 기대는 잘 구축된 IT수단을 타고 보이지 않는 손이자 경제의 언어인 ‘가격’ 을 변화시킨다.
그렇다면 과연 대중으로 대표되는 경제주체들의 기대에 영향을 줌으로써 보다 긍정적인 결과를 유도하기 위한 정보의 제한 등은 합리화될 수 있을까? 아니면 대중에게 모든 정보를 정확하고 솔직하게 공개함으로써 대중의 기대에 의해 경제가 좌우되도록 놔두어야 할 것인가?
핀 키들랜드와 에드워드 프레스콧에 의해 주창된 ‘동태적 비일관성’ 은 개인, 기업, 정부 등의 경제주체가 세운 계획이 상황 변화에 따라 뒤바뀌는 것을 일컫는 경제학 용어이다. 예를 들어 중앙은행이 물가상승률을 3% 이내로 억제하겠다고 대중에게 공표했다고 가정해 보자. 국민들이 이를 믿고 3% 물가상승을 예상하면, 그때는 슬그머니 물가상승률이 처음 내세웠던 3%보다 높게 올라가는 것을 용인하는 대신 성장률을 높이는 쪽으로 정책목표를 변경한다. 당초 목표로 삼았던 인플레이션 억제가 충족되자 또 다른 목표가 시야에 들어오면서 애초 세웠던 계획을 수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책당국의 이런 행동은 국민들의 신뢰를 잃게 한다는 것이다. 결국, 국민들은 나중에는 정책당국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기대를 형성하게 된다.
게임 상황을 가정해보자. 앞에서 언급된 의 상황은 일회성 게임이므로 그러한 정보의 통제가 나중에 밝혀진다고 해도 똑같은 전쟁 상황에 부닥치지 않는 이상 대중들은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전쟁의 경우 일단 발생하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도 막으려 하는 방향 자체는 적절할 수 있다. 하지만, 정책은 반복적인 게임이다. 정책당국과 대중은 서로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상대방의 수를 계산하게 된다. ‘적은 수를 오랫동안 속일 수 있고 많은 수를 잠시 동안 속일 수 있지만 많은 수를 오랫동안 속이지는 못한다.’라는 링컨의 말은 반복되는 게임 상황 하에서 더욱 진실이 된다. 만약 정책이 대중과의 ‘반복되는 게임’ 이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대중의 기대를 바꾸기 위해 대중에게 제공하는 정보를 무리하게 통제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정책 당국에도 좋은 선택지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무비용 반인플레이션’ 이론에 따르면 정책이 사전에 공표되고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되며 민간이 정책을 신뢰하는 등의 가정이 성립하는 경우 인플레이션 억제정책은 실업률 상승이라는 희생 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위의 언급된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이다. 신뢰를 얻으면 비용 없이 정책 목표를 달성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그만큼 얻기 어려운 것이 바로 신뢰인 것이다.
이렇듯 신뢰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정책기관은 정보제공에 신중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서는 태풍이 되듯 정책당국의 메시지가 시장에 충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복되는 게임 상황에서 시장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것과 시장에 과도한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그 신뢰를 감안하여 메시지를 신중하게 전달하는 것. 정책의 묘미는 이 두 가지의 절묘한 조합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이창민 채권시장팀 조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