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
[제994회] 중앙은행의 역사와 발전
(2025. 04. 11(금), 법규제도실 금융법규팀 이수환 과장)
(이수환 과장)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은행 법규제도실 금융법규팀 이수환 과장입니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한국은행에 관심을 갖고 금요강좌를 들으러 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중앙은행의 역사와 발전을 주제로 강의를 준비했는데. 사실 중앙은행 제도도 쉽지 않은 주제인데 역사 얘기를 한다고 하니 더 지루하거나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어서, 최대한 그림 위주로 많이 준비를 했습니다. 근데 그림이나 사진 자료를 많이 실었는데, 제가 한 말들을 막 적으실 필요는 없고요. 앞선 강의들도 보니까 다 자막이 올라가더라고요. 인터넷에. 그래서 인터넷에 나중에 확인하시면 되고,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들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날씨가 좋은데 여기 강의 다 들으시고 이제 덕수궁이나 저기 남산도 한번 둘러보시고 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주말에 또 비가 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p.2)
[1. 들어가며] (p.3)
이렇게 많은 시중 은행들이 있는데, 여러분들도 이 은행 중에서 하나 이상의 계좌를 갖고 계실 겁니다. 근데 혹시 한국은행에 계좌가 있으신 분 계실까요? 제가 명절에 한번 여기 한국은행에서 당직을 선 적이 있는데, 당직을 서면 많은 전화들이 오거든요. 일반 시민분들이 전화를 주시는데. 어떤 할머니께서 한국은행에 자기 계좌에 돈이 있는데 돈을 인출해 달라고 전화를 하신 분도 계시고. 근데 개인에게 한국은행이 계좌를 열어 주지 않기 때문에 약간 악성 민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래서 한국은행도 은행이니까 이런 시중 은행들과 같다고 생각하시는 분 혹시 계실까요?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시면 아주 잘 들으러 오신 것 같습니다. 한국은행은 이런 시중 은행이 아니고 central bank, 중앙은행입니다. 중앙은행은 통화 정책을 이제 수립하고 시행하고, 그리고 발권이나 국고 업무 같은 중앙은행의 기본적인 업무를 수행합니다. 그런데 최초의 중앙은행들은 상업금융 업무를 시작을 했죠. 물론 아닌 나라도 있긴 한데, 영국이나 스웨덴 같은 아주 오래된 그런 중앙은행들을 보면 상업은행 역할을 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처음에는 상업으로 시작을 했다가 이제 화폐 발행 독점권을 받으면서 그 대가로 정부에 대해서 필요한 자금을 대출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정부의 자금을 대출해 준다고 해서 중앙은행은 정부의 은행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갖게 되면서 이제 다른 시중 은행들에게 또 자금을 필요할 때 대출해 주는데, 그래서 은행의 은행이라고 부릅니다. 이 은행의 은행이라는 표현에서 이제 또 최종대부자, lender of last resort 라는 표현도 나오는데. 정리하면 정부의 은행, 그리고 은행의 은행과 같은 국가적인 업무를 수행하게 되면서 이제 상업 금융 업무가 축소, 폐지됩니다.
[1. 들어가며 - Old Lady of Threadneedle Street?] (p.3)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앞서 재미난 그림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Threadneedle Street의 노부인이라는 삽화인데, 정부의 은행 역할을 하는 것을 이제 묘사하고 있습니다. 1797년에 제임스 길레이가 그린 삽화인데. 노부인에게 구애하는 남자가 바로 그 당시 총리였던 윌리엄 피트입니다. 브레드 피트 아니고 윌리엄 피트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노부인이 바로 영란은행을 상징하는데, 지금도 영국에서는 영란은행을 노부인이라고 종종 묘사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이제 노부인에게 구애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제 손을 자세히 보시면 주머니, 노부인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있습니다. 노부인의 지폐, 노부인이 입고 있는 옷이 바로 1달러나 2달러로 만들어진 지폐인데, 그 당시에 금화를 대체하기 위해서 이런 1파운드와 2파운드 지폐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노부인이 앉고 있는 상자를 자세히 보시면 Bank of England라고 쓰여 있습니다. 은행의 준비금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노부인이 이 상자를 보호하듯이 딱 앉아 있고요. 그리고 그 뒤에 배경을 보시면 바로 영란은행이 있던 Threadneedle Street 건물인 사무실을 배경으로 하고. 그리고 좀 뿌옇게 보이지만 자세히 보시면 뒤에 창구에 앉아 있는 직원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오른쪽 바닥에 보시면 Loans라고 이렇게 문서가 보이는데, 이제 영란 은행에서 돈을 빌리라는 피트 정부의 지속적인 요구를 의미합니다. 그림이 그려진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아까 1797년에 이 삽화가 그렸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영국에 선전 포고, 프랑스가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한 지 3년 후에 그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영란은행은 1946년에 국유화가 돼서 이 당시에는 민간은행 형태였습니다. 대신에 왕실로부터 Charter라고 일종의 특허를 받아서 운영이 되었던 민간 은행이었는데. 이제 프랑스가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나서 3년 후에, 1797년 2월에 어 웨일스 해안에 프랑스 군사들이 대거 상륙하면서 영국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 당시에 영란은행에 막 사람들이 지폐를 금으로 교환하려고 넘쳐났고, 이러한 상황에서 윌리엄 피트 정부가 영란은행에 돈을 달라고 대출을 요구하는 것이죠. 영란은행을 정부의 은행으로서 역할을 묘사하고 풍한 것이라면,
[1. 들어가며] (p.5)
그다음 그림이 바로 은행의 은행을 묘사하는 그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스티브 벨이라는 만화가가 앞서 길레이의 삽화를 재해석해서 그린 그림인데. 이 노부인 주위에 있는 고양이들은 영국의 대형 은행들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은행들이 금융 시장에 돈을 좀 더 풀어 달라고 영란은행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영란은행을 중앙은행이, 정부나 은행들이 돈을 달라고 하면 그냥 순순히 주는 존재일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중앙은행의 사명과 목적이 있기 때문에.
[1. 들어가며 - Charter of the Bank of England] (p.6)
다음 그림을 보시면 영란은행 헌장인데요. 작은 글씨로 이제 하얗게 표시가 된 부분인데, 그 부분이 'We being desires to promote the public good and benefit of our people' 이라고 돼 있어서 우리가 국민의 이익을 증진하기를 원한다 이렇게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 영란은행 헌장에서 말하는 중앙은행의 사명은 바로 물가 안정을 통해서 국민의 이익을 증진하는 것입니다.
[1. 들어가며 - Willian McChesney Martin] (p.7)
그다음 보실 분이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이라는 분인데 바로 미국 연준의 역대 최장수 의장을 지낸 분인데. 1951년 4월에 취임을 해서 1970년 1월까지 19년 가까이 임기를 마친 연준 의장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이 PPT에도 묘사를 해 놨는데, 언급을 해 놨는데. 연준의 역할이 뭐냐면 바로 파티가 뜨거워질 때 펀치 볼을 치우라고 명령하는 보고자 입장이 있다. position of the chaperone 하고 who has ordered the punch bowl removed 이렇게 돼 있죠. 그리고 이 표현 앞에 또 연설하실 때 언급한 말이 있는데 어떤 말이냐면, 통화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당신이 박수를 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박수를 받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표현이 참 멋지지 않나요? 그만큼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다, 정치적인 영향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중앙은행이 물가 안정을 통해서 국민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박수받기를 바라지 않는 보호자의 입장에 있기 위해서 어떻게 성장하였는지. 그동안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주요국 중앙은행의 역사와 발전(스웨덴)] (p.8)
보이시는 사진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중앙은행으로 불리는 스웨덴 릭스방크입니다. 1668년에 설립이 됐는데. 우리나라는 그 당시 현종이 있던 시기고, 예송논쟁이 활발하던 그런 시기입니다. 아무튼 이 릭스방크가 3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중앙은행입니다.
[2. 주요국 중앙은행의 역사와 발전(스웨덴)] (p.9)
이 릭스방크가 무에서 유로 뚝딱 생긴 건 아니고, 전신이 바로 스웨덴 최초의 은행인 스톡홀름 방코입니다. 이 왼쪽에 바로 허가해 준 칼 10세, 칼 10세라는 사람이고. 욕이 아니고 칼 10세이고. 그리고 오른쪽이 네덜란드 상인 출신의 요한 팜스트루흐라고 합니다. 이 요한 팜스트루흐가 수려한 외모와 화려한 언변으로 귀족과 왕들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설득을 해서 스톡홀름 은행의 설립 허가를 받아냈죠. 근데 이 오른쪽에 보이시는 요한 팜스트루흐는 이렇게 훌륭한 일을 했지만 결국에는 사형 선고를 받게 됐는데, 그거는 이따가 나중에 말씀드리고. 이 스톡홀름 은행에서 환전 부서를 만들어서 구리 동전을 가져오면 보관증을 내주고 했다고 합니다.
[2. 주요국 중앙은행의 역사와 발전(스웨덴)] (p.10)
왜 보관증의 발급이 필요했냐 하면, 이 왼쪽에 보시면 구리 동전입니다. 스웨덴은 다른 나라랑 달리 구리 주화를 사용했습니다. 금이나 은이 없었기 때문에, 부족했기 때문에 스웨덴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목이었던 구리를 사용해서 동전을 만들었습니다. 근데 보시는 것처럼 오른쪽 위에 보시면 상당히 크고 무거운 걸로 짐작이 되는데, 가장 무거운 건 20km까지 갔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런 무거운 구리 주화를 거래하기 힘드니까 이 구리 주화를 스톡홀름 방코에서 예치를 받고, 대신 보관증을 내주고. 이 보관증으로 거래를 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보관증이 이제 발전을 해서 오른쪽 아래에 보시는 크레딧 노트로 이제 만들어졌는데. 이게 1661년, 1661년 유럽 최초의 지폐에 해당하는 크레딧 노트로 발전했습니다. 이 크레딧 노트가 너무 인기가 많아 가지고 사람들이 많이 이거를 발급받아서 쓰고 있고, 그리고 특별한 점은 이 지폐, 크레딧 노트가 구리 동전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스톡홀름 방코에서는 점점 더 많은 크레딧 노트 지폐를 인쇄하기 시작했고, 더 많은 지폐를 인쇄하다 보니까 가치가 하락하게 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그래서 더 신뢰가 사라지고. 그래서 사람들이 이제 은행에 찾아와서 구리 동전으로 되돌려 달라, 이렇게 요구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근데 동전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은행은 결국 파산하고, 아까 말씀드린 수려한 외모의 요한 팜스트루흐는 결국에 은행을 잘못 경영한 것을 죄목으로 이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결국에는 집행 유예를 받았지만 1670년까지 감옥에 갇혀 있고 그다음 해에 사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스톡홀름 은행의 중요한 교훈을 발판 삼아서 릭스방크가 설립이 되는데.
[2. 주요국 중앙은행의 역사와 발전(스웨덴)] (p.11)
일단 인플레이션이 문제 됐었기 때문에 릭스방크 임무 중 하나가 바로 물가 안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근데 이런 릭스방크가 시련의 시기가 있었는데, 왼쪽 사진을 보시면 절대 군주였던 샤를 11세입니다. 처음 릭스방크를 설립할 때는 왕권이 릭스방크에 관여해서 안 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는데. 샤를 11세는 자신의 영향력을 릭스방크에도 미치게 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릭스방크는 한 때 국왕 폐하의 은행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샤를 11세든 샤를 12세든 거치면서 전쟁이 많았고, 그때마다 많은 대출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힘든 시기가 있었는데, 오른쪽 위에 보시면 이제 1901년에 랑겐 스키웰드라는 총재가 임명하게 되면서 현대적인 중앙은행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습니다. 이 랑겐 스키웰드는 1897년에 지폐 발행권을 릭스방크에 부여하는 작업에 참여하면서 찬사를 받았고, 그래서 총재로 임명될 수 있었습니다. 이 지폐 발행 독점권을 부여하는 작업이 1897년부터 있었지만, 실제 법에는 1904년부터 실제 시행되면서 그 당시에 이제 민간 은행에서도 발행됐던 지폐들이 잠깐 동안은 같이 유통이 되었는데, 오른쪽 아래에 보시면 민간 은행에서 발행한 지폐입니다. 사실 현대에 와서는 중앙은행에서 발행하는 지폐 말고 다른 은행들이 개별적으로 발행하는 지폐가 있다는 것을 사실 상상하긴 힘든데. 이 당시에는 릭스방크가 지폐 발행 독점권을 부여받기 전이라서 민간 은행에서도 오른쪽 아래와 같은 은행권을 발행을 했고, 그래서 릭스방크가 독점권을 갖기 전까지 그리고 이제 실제로 시행되는 1904년부터 1906년까지 이미 유통된 지폐들은 유통되었습니다. 이렇게 릭스방크가 은행권 발행 독점권을 갖게 되면서 예금 대출 업무는, 상업은행이 하는 예금 대출 업무는 이제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발권력을 중앙은행이 갖는다는 것은 아주 큰 의미가 있는데.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통제할 수 있어야 통화 정책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중앙은행이 뭐 어 통화량을 조절하고 싶은데 다른 시중은행에서 발권을 한다, 그러면 통화 정책을 제대로 실시할 수 없게 되겠죠. 이렇게 릭스방크가 발권력을 갖게 된 이후에도 순탄한 길을 간 것은 아닙니다.
[2. 주요국 중앙은행의 역사와 발전(스웨덴)] (p.12)
세계 제2차 대전을 거치면서 또 여러 가지 힘든 상황이 있었지만, 이제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1995년에 EU에 가입한 것입니다. 1995년에 스웨덴이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서명을 하면서 EU에 가입하게 되는데, 왜 마스트리히트 조약이라고 불리냐면 이제 네덜란드 소도시에 있는 마스트리히트에서 체결되었기 때문에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식 명칭은 유럽 연합 조약인데, 유럽 연합 조약을 읽어 보면 그 안에 이제 중앙은행이 다른 기관으로부터 지시를 받지 않는다, 이렇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즉 이 유럽 연합 조약 덕분에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확보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독립성을 확보했는지는 종속적인 중앙은행보다 독립적인 중앙은행이 경제 정책을 수행함에 있어서 더 효과적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제 스웨덴 릭스방크의 350년 역사를 아주 빠르게 살펴보았습니다.
[2. 주요국 중앙은행의 역사와 발전(영국)] (p.13)
그다음은 영국 영란은행입니다. 이 화면을 보시면 아래에 작은 글씨로 돼 있는데, IMF 보고서에서 이제 제가 발췌한 건데. 뱅크 오브 잉글랜드가 최초의 센트럴 뱅크다, 이렇게 표시가 돼 있습니다. 그래서 릭스방크가 최초냐, 영란은행이 최초냐 약간 의견이 분분하긴 한데. 일단 영란은행에 대해서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주요국 중앙은행의 역사와 발전(영국)] (p.14)
왼쪽에 보시면 이 영란은행 헌장이고, 이 오른쪽은 헌장을 작성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영란은행은 영국의 명예혁명 이후에 설립되었는데. 직접적인 목적은 프랑스에 대한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설립된 것입니다. 1690년에 비치 헤드 전투가 있었는데, 영국이 이제 해군 강대국이었던 프랑스에 참패하면서 영국 정부가 당황하게 됩니다. 그래서 강력한 해군을 만들려면 돈이 필요한데, 그 당시에 윌리엄 3세가 신용이 낮아서 120만 파운드를 빌리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2. 주요국 중앙은행의 역사와 발전(영국)] (p.15)
그래서 이 왼쪽에 있는 인물, 이분이 윌리엄 페터슨이라는 분인데. 스코틀랜드 출신의 상인입니다. 이 윌리엄 패터슨이 상인 친구들하고 이제 영국 정부에 제안서를 내게 됩니다. 상인들을 주주로 모아 가지고 120만 파운드를 조달한 다음에 은행을 세워서 그 돈을 전부 왕한테 대출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인들한테는 이 출자한 금액만큼 은행권을 발행해 줘서 화폐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제안서를 낸 윌리엄 페터슨이 영란은행의 초대 이사였고, 가입자는 그 당시에 1,268명이라고 합니다. 이 오른쪽에 보이시는 장면이 바로 어 1694년의 가입자, 즉 주주 명단인데. 자세히 보시면 서명, 주소, 사회적 지위 이런 것들이 수기로 적혀 있습니다.
[2. 주요국 중앙은행의 역사와 발전(영국)] (p.16)
그다음 보시는 화면이 바로 주식 원장입니다. 은행 주식에 대한 거래 내역을 기록한 최초의 은행 주식 원장인데. 여기에는 윌리엄 왕과 메리 여왕의 주식 거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인들뿐만 아니라 윌리엄 왕과 메리 여왕도 10,000파운드 주식을 여기에 투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tmi이긴 한데, 영란은행이 1694년 8월 1일에 영업을 시작했는데 당시 직원이 17명뿐이었다고 하고, 문지기가 두 명 있다고 합니다.
[2. 주요국 중앙은행의 역사와 발전(영국)] (p.17)
근데 초기의 영란은행은 상업은행적인 요소가 남아 있었는데, 왼쪽을 보시면 초대 총재인 존 휴블런 경입니다. 이 존 휴블런 경은 영란은행의 초창기에 이제 정부에 대출을 해 주고, 또한 대중들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이제 예금을 받는 전통적인 은행 사업도 하였습니다. 근데 이제 왼쪽에 보이시는 이 존 휴블런 경의 얼굴이 박혀 있는 이 은행권은 1994년 이후에 만들어진 지폐고, 오른쪽에 보시는 이 지폐가 1725년 당시에 만들어진 지폐입니다. 그 당시 지폐는 일부 손으로 쓰인지폐였습니다. 고객이 예금한 특정 금액을 이렇게 손으로 쓰는 건데, 너무 화폐 질이 조잡하기도 했고 그리고 제가 초반에 말씀드린 1파운드 2파운드짜리 지폐를 이제 금화의 부족을 보상하기 위해서 많이 만들었다고 말씀드렸었는데. 이렇게 많이 새로운 화폐들을 만들고 조잡하기도 해 가지고 지폐 위조가 횡행하기도 했습니다. 새 지폐에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위조를 해도 많이 속게 되는 것입니다.
[2. 주요국 중앙은행의 역사와 발전(영국)] (p.18)
그다음 보시면, 왼쪽에 보시면 이제 영란은행에 압수가 돼서 이제 Forged 라고 위조되었다고 이렇게 찍힌 화폐가 보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에 보시면 화폐같이 생겼는데 자세히 보시면 여기 교수형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죠. 이게 그 당시에 지폐 위조는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로 간주되었는데, 1797년에서 1821년 사이에 3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위조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이때 풍자 예술가인 조지 크루이크생크가 이 지폐 위조에 대한 가혹한 처벌 그리고 영란은행의 좀 무관심한 태도 이런 걸 조롱하면서 화폐 모양으로 저 판화를 디자인했는데. 화폐가 아니고 화폐를 패러디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영란은행도 더 이상 사람들이 위조를 못 하도록 좀 디자인을 흉내 낼 수 없게 만들자 이런 노력도 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디자인도 받아봤고. 그리고 물결 모양이나 이런 복잡한 워터마크도 만들기도 했습니다.
[2. 주요국 중앙은행의 역사와 발전(영국)] (p.19)
그러다가 이제 1844년에 은행 헌장법이 만들어졌는데. 이 왼쪽에 보시는 게 은행 헌장법 첫 페이지입니다. 여기서 영란은행이 지폐 발행을 공식화했는데, 영국과 웨일즈에서 자체적으로 지폐를 발행하는 모든 은행, 회사, 개인에게 제한을 가한다. 그리고 새로운 은행이 지폐를 발행하기 시작하는 것을 막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지나고 1946년에 영란은행이 국유화됩니다. 과거에 영란은행은 오랫동안 개인 소유였지만, 이제 국유화되면서 좀 더 국가적인 기관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오른쪽에 계신 분이 영란은행 역사에서 중요한 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고든 브라운입니다. 영국의 노동당 소속 정치인인데. 2007년 당시에는 영국 총리였고, 1997년에는 토니 블레어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맡은 분입니다. 놀라운 것은 재무장관이었던 1997년에 이분이 영란은행에 독립성을 부여했다는 것인데. 기존에는 금리 결정에 대해서 최종 책임을 재무장관에게 주었고, 잉글랜드 은행은 자문 기능을 제공했다고 합니다. 근데 이제 고든 브라운이 통화 정책을 결정하는데 정치적 고려가 있으면 안 된다, 정치적인 고려를 염두에 두고 통화 정책을 수립했다는 인식이 있으면 사람들이 통화 정책에 대한 신뢰를 갖지 않을 것이다, 신뢰가 훼손될 것이다. 이렇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권력을 나눠 주는 게 사실 엄청 쉽지 않은 일인데, 이 고든 브라운은 영란은행에게 독립성을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고든 브라운이 1997년 5월 20일 의회에서 영란은행이 금융 시스템 전체의 안정성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발표를 했고, 그리고 1998년 영란은행 은행법이 이제 개정되면서 영란은행의 운영상의 독립성을 부여받게 됩니다. 지금까지 또 영란은행의 역사를 아주 빠르게 훑어봤고요.
[2. 주요국 중앙은행의 역사와 발전(미국)] (p.20)
그다음은 또 이제 미국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국은 영국이나 스웨덴에 비해서 좀 늦습니다. 그래서 영란은행을 많이 벤치마킹을 했는데, 왼쪽에 보이시는 것이 바로 콘티넨탈이라고 알려진 지폐입니다. 미국이 독립 전쟁 자금을 마련하려고 이제 1700년대에 지폐를 발행했는데, 근데 이게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정도로 수량이 아주 많이 발행이 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결국 지폐에 대한 신뢰를 하지 않게 되고, 쓸모없다고 느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은행권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통화와 신용을 규제하는 중앙 조직이 필요하다 이런 주장이 있었는데. 반대로 국회에서 그런 조직을 설립할 권한이 없다 이런 반박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오른쪽에 보시는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죠. 초대 재무 장관이었는데. 이분이 이제 의회에 요청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1791년에 제1합중국은행이 설립이 되고, 이 제1합중국은행은 1791년부터 1811년까지 운영이 됩니다. 그리고 1816년에 제2합중국은행이 설립이 됩니다. 1816년부터 1836년까지 운영이 됩니다. 둘 다 필라델피아에 본부를 두고 영란은행을 벤치마킹하였고, 그리고 각각 20년간 존재하다가 재인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왜 재인가를 받지 못했을까요? 그 당시에는 영국인들과 달리 미국인들은 어 일반적으로 금융 권력이 집중되는 것 그리고 중앙 조직에 어떤 뿌리 깊은 불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이제 농업지향적인 미국인들이 많아서, 거대한 강력한 은행이다라는 개념에 좀 많이 불편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1은행의 경우에는 의화에서 단 한 표차로 갱신을 거부당했다고 합니다.
[2. 주요국 중앙은행의 역사와 발전(미국)] (p.21)
그다음에 보실 분이 제7대통령인 앤드류 잭슨인데, 이분이 거부권을 행사해서 제2은행을 제2인가를 거부했습니다. 이분은 유명한데 뱅크 워라고 하죠, 이분은 1828년에 그 앤드리 잭슨이 이제 대통령에 당선이 되자 중앙은행을 없애겠다 이렇게 공헌을 했다고 합니다. 이분은 서민 출신으로 이제 캐롤라인 벽지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고 그리고 전쟁 영웅이라고 해서 국민들의 지지를 엄청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 트럼프 대통령도 이분을 아주 존경해서 집무실에 초상이 있다고 하는데. 앤드류 잭슨에 대한 평가가 지금 좋은 평가도 있고 나쁜 평가도 있고 한데. 아무튼 이분은 중앙은행을 없애야 한다, 그래서 그 당시에 제2은행 재인가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앤드류 잭슨이 거부해서 재인가를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왜 그렇게 반대했냐?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이분이 부동산 사업을 하다가 사기에 휘말려서 은행에 아주 안 좋은 반감이 있었다 이런 얘기도 있고, 그리고 그 당시에 서민 출신이기 때문에 서민들의 돈을 모아서 무단으로 일부의 특권을 사용한다 이런 선입관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앙은행의 적이었던 분이 20달러 지폐에 새겨졌다는 게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그래서 이 분 이후로 75년 이상 중앙은행이 없었는데요.
[2. 주요국 중앙은행의 역사와 발전(미국)] (p.22)
근데 그다음 사진을 보시면 이제 왼쪽에 유명한 바로 JP 모건입니다. 중앙은행이 없다 보니까 뱅크런 그리고 금융공황이 계속해서 간헐적으로 발생하게 되고, 그래서 중앙은행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공황이 이제 생기면 금융계의 거물인 JP 모건이 개입해서 겨우 안정을 찾고.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국민들도 중앙은행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제 공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른쪽 사진을 보시면 바로 연방 준비 제도법에 서명하는 윌슨 대통령의 그림인데. 1913년 12월 23일에 연방 준비 제도법이 제정되게 됩니다. 재밌는 사실이 1913년 12월 23일 바로 크리스마스 이전에 이 법안이 통과된 건데, 그 당시에 네이션지 사설에 따르면 이 법안이 의회에서 나와서 대통령 책상에 올려진 주된
동기가 상원 의원들이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내고 싶어 해서 그렇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역사적인 사실들을 보면 종종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우연들이 이런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제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연준은 이제 제1합중국은행이나 제2합중국은행과 달리 완전히 공적인 기관으로 연방 준비 위원회를 만들게 됩니다.
[2. 주요국 중앙은행의 역사와 발전(미국)] (p.23)
그리고 이제 대공황을 거치면서 1933년과 1935년의 은행법에 의해서 연방 공개 위원회 FOMC가 창설이 됩니다. 이 사진을 보시면 루스벨트 대통령이 1933년에 은행법에 서명을 하고 있습니다. FOMC는 이제 국가 통화 정책을 결정하는 연방 준비 제도의 기관인데, 이 FOMC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연방 준비 제도 초창기에 12개의 연방 준비은행이 개별적으로 서로 협력해서 공개 시장 조작을 수행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분산된 운영 방식을 갖고 있다 보니까 비효율성을 초래했습니다. 그래서 FOMC를 만들어서 일관된 정책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제 연방 준비은행을 통해 이제 사적 통제로부터 벗어나서 연준 위원회를 통해서 공적 통제로 전환하게 되고, 이제 특정 이익 집단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3. 한국은행의 역사와 발전] (p.24)
지금까지 미국에 대해서 또 빠르게 살펴봤고요. 다음으로 한국에 대해서 드디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에 대해서 살펴보기 전에 우선 근대적인 은행이 있었나,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개화기 때부터 이제 그런 은행들을 설립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1894년에 갑오개혁 이후에 근대적인 은행을 도입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는데, 이 사진에 보이시는 게 바로 한성은행입니다. 민간 자본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한성은행이 있었고, 그리고 제가 사진을 갖고 오진 않았지만 대한제국의 관청이었던 탁지부랑 어 황실이 설립에 개입한 조선은행이 있었고, 그리고 반관반민으로 국립은행을 표방했던 대한은행. 이렇게 설립이 추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은행들은 독점적인 발권력을 가진 근대적인 중앙은행으로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경영 부실로 폐지되거나, 민간 상업 금융 기관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3. 한국은행의 역사와 발전] (p.25)
그러다가 이제 제도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우리나라 중앙은행이 설립이 되는데, 바로 이제 1903년 3월에 설립된 대한중앙은행이 바로 우리 제도적 의미에서 최초의 중앙은행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이 바로 대한중앙은행의 설립 근거인 칙령에 해당하는 조례인데. 왼쪽에 보시는 게 칙령 제8호. 1903년 3월 24일에 만들어진 칙령 8호이고 중앙은행 조례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에 보이시는 게 바로 9호 태환금권조례가 있는데. 대한중앙은행 정관도 이 조례들과 함께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 당시에 대한중앙은행의 자본금이 300만 원이라고 하는데, 그 당시에는 아주 많은 금액이라고 하는데. 이 왼쪽에 중앙은행 조례에 따르면 내국인만 주주가 될 수 있었고, 외국인에게는 주식을 처분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에 이제 태환금권조례가 있는데, 태환금권이 뭐냐 하면 바로 지폐입니다. 중앙은행권인데 금본위 지폐입니다. 태환금권을 중앙은행이 이제 금화로 바꿔 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일본계 은행인 제일은행이 은행권을 발행해서 유통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에 맞서서 한국의 독자적인 금본위 지폐를 만들기 위해서 조례를 제정한 것입니다. 당연히 이때 일본은 대한중앙은행의 설립을 반대했습니다. 1903년 3월 24일에 이 조례들이 공표가 되자, 당시에 주한일본공사가 시행을 늦춰야 한다는 반대 공문을 발송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었지만 아직 대한제국이 신용이나 재정 상태가 좋지 못하다, 이런 이유를 들었습니다. 이러한 대한제국의 제도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중앙은행, 대한중앙은행이 이제 만들어졌지만 정상적으로 개시가 되었는지 보여주는 자료는 현재 전해지고 있지 않아서 안타깝습니다.
[3. 한국은행의 역사와 발전] (p.24)
그다음에 보시는 장면이 바로 일제의 잔재인데. 그 당시 일본이 이제 대한제국을 압박하면서 화폐 조례를 시행하도록 하는데, 그러면서 이제 대한제국의 국고금 취급 사무나 화폐 정리 사업을 제일은행 경성 지점에 위탁하도록 합니다. 이제 왼쪽에 보이시는 이 사진이 제일은행 경성 지점이 1906년 5월 한국 총지점으로 승격이 되는데, 그 한국 총지점의 도면 사진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른쪽에 보시는 사진이 많이 눈에 익으실 텐데, 오시면서 보실 수 있는 화폐 박물관 사진입니다. 제일은행 경성 지점이 아까 총지점으로 승격하면서 이렇게 도면을 만들었는데, 그게 건설이 쭉 진행되면서 1912년에 조선은행 본점으로 완공이 되었다가 그다음에 1950년 6월부터는 한국은행 본관으로 사용이 되었고, 이제 2001년부터 현재까지는 화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3. 한국은행의 역사와 발전] (p.27)
제일은행 경성 지점을 통해서 유통되던 화폐가 이제 다음 보시는 화면인데, 왼쪽이 구 10권이고 오른쪽이 신 10권입니다. 이제 일본은 제일은행권을 공인하면서 무제한 통용되게 했고, 사실상 대한제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맡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일부 지역에선 이런 제일은행권을 많이 쓰기도 했는데, 대한제국 정부 요인이나 지식인들은 이런 화폐가 돌아다니는 것이 제국주의 선봉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배척 운동을 또 적극적으로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에 이제 1905년에 을사늑약에 따라서 조선 통관부에 이제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취임을 하게 되는데. 이제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에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킵니다.
[3. 한국은행의 역사와 발전] (p.28)
그러면서 이제 제일은행을 대신할 중앙은행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는데, 제일은행 경성 지점과 같이 상업 은행이 아니고 중앙은행을 만들어서 한번 운영해 보자는 것입니다. 사진에서 보시는 것이 바로 한국은행 조례입니다. 이제 대한제국의 중앙은행으로 한국은행을 설립하는데 지금의 한국은행과 달리 구별하기 위해서 이제 구 한국은행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한국은행 조례와 각서, 협정 이런 걸 토대로 제일은행 경성 지점이 그동안 갖고 있던 토지, 건물, 고용인들을 한국은행이 그대로 인수하게 됩니다. 그리고 제일은행이 발행한 은행권들을 구 한국은행이 발행한 것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구 한국은행은 사실상 일본 제일은행을 승계한 것이다, 일본 제일은행 경성 지점을 승계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아래에서 보시는 사진이 바로 구 한국은행권 10원권입니다.
[3. 한국은행의 역사와 발전] (p.29)
그다음 이제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병한 이후에는 조선은행을 설립하게 됩니다. 이 조선은행의 설립 근거 법률이 바로 조선은행법인데, 일본국의 법률입니다. 그래서 일본 의회에서 통과가 되면서 이제 조선은행이 만들어졌는데, 조선은행이 이제 식민지 중앙은행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습니다. 일본에 강제로 병합이 됐는데 왜 또 중앙은행을 또 만드냐, 일본 은행이 있는데 왜 만드냐. 그리고 이 조선은행은 일본 대장성의 감독을 받냐, 아니면 조선 총독부의 감독을 받냐. 이런 논란들이 있었는데. 그 당시 일본은 근대적인 은행들이 많이 있었고, 그리고 일본 은행은 상업은행 기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근데 조선에는 당시 이제 대한제국에는 이제 근대적인 은행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경제 변화가 일본에 영향을 미치면 안 됐기 때문에 그래서 조선은행을 만들어서 중앙은행 겸 상업은행도 해라, 그리고 조선의 경제가 이제 일본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이렇게 하는 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조선은행은 감독을 누가 하냐. 그래서 일본 대장성이 해야 된다, 조선 총독부가 해야 된다, 되게 이렇게 논란이 있었는데. 타협을 해서 조선은행법의 수정은 조선 총독이 대장대신과 협의를 해서 해라. 그리고 조선은행법 시행령 변경은 조선 총독이 대장대신에 보고하는 방식으로 해라. 이런 식으로 타협이 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 은행권이 이제 일본에서 통용되고 있는데, 식민진인 조선에서 왜 조선 은행권을 또 만드냐. 이런 내부적인 일본에서는 반발이 있었는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제 조선의 경제가 일본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고. 그리고 조선 상업에 특화된 화폐가 만들어진다 이런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오른쪽 아래에 보시면 조선은행권입니다. 100원권과 10원권입니다.
[3. 한국은행의 역사와 발전] (p.30)
이렇게 진행이 되다가 태평양 전쟁에서 드디어 일본이 패배한 후에, 이제 남한 지역에서 미군정이 시작됩니다. 조선은행은 이제 미군정의 소유로 넘어가게 되고 그리고 중앙은행의 역할을 계속 수행하게 됩니다. 다만 이제 미군정은 외국환 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이 없다 해서 그 당시 조선환금은행을 만들었는데. 이게 미군정청이 대한민국 정부로 재정을 이양하면서 조선환금은행도 넘어갔고, 조선환금은행이 조선은행에 통합되게 됩니다. 근데 이제 해방이 됐으니까 드디어 이제 우리나라도 중앙은행을 설립하자, 이런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 당시 이미 존재했던 조선은행하고 우리나라의 그 재무부하고 생각이 많이 달랐습니다. 재무부에서는 자기가 많이 중앙은행에 개입을 하길 원했고, 중앙은행에서는 그런 개입을 줄이기를 원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나 하다가 바로 미국에 자문을 받도록 합니다. 그게 바로 유명한 블룸필드 박사와 젠슨에게 자문을 받도록 하는데. 왼쪽에 보시면 이 블룸필드와 젠슨이라는 뉴욕 연준의 직원이었는데. 이분들한테 이제 조사를 받고, 그리고 보고서를 제출받게 됩니다. 그게 바로 왼쪽의 한국 중앙은행 제도 개편에 관한 건의서입니다. 이 보고서에서 오른쪽에도 나와 있긴 한데, 배경에 쓰여 있습니다. 이 보고서를 작성하게 된 배경이. 그 당시에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있었고 그리고 아무래도 해방 직후다 보니까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도 있었고. 그리고 약간 후진적인 경제 여건도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인 압력과 간섭으로부터 독립해서 통화 신용 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중앙은행을 설립하자. 이런 중앙은행 제도 개편의 목적을 이 보고서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블룸필드와 젠슨이 이렇게 보고서도 만들고 한국은행법 초안도 작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블룸필드와 젠슨의 법률 초안이 국회의 심의 과정을 거쳐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이제 한국은행법이 제정되게 됩니다.
[3. 한국은행의 역사와 발전] (p.31)
그래서 1950년 5월에 한국은행법이 드디어 이제 공표가 됐는데. 그 당시에 이제 구용서 총재님이 이제 한국은행이 처음 창립되면서 담화문을 발표합니다. 이 담화문에 바로 한국은행법의 입법 정신이 잘 적혀 있는데. 한국은행법의 입법 정신은 뭐냐 하면, 첫 번째가 바로 통화 가치의 안정입니다. 당시 아까 말씀드렸듯이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있었고 한국 경제가 상당히 망가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 맨 밑에 빨간 줄로 제가 표시를 해 놨는데. 경제 안정이 당면한 긴급성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통해서 물가 안정이 얼마나 시급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금융의 민주화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민주적 기구를 창설한다, 그리고 경제적 민주주의를 하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금융의 민주화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입법 정신이 바로 정치적 중립입니다.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초연한다 이런 표현이 있는데, 그만큼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재정 당시에도 명백히 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4. 나가며] (p.32)
그다음 이제 마무리하면서 제가 인상적인 사진을 가져왔는데. 바로 전쟁 중에 파괴된 한국은행 사진입니다. 지금도 화폐 박물관 옆 벽면을 보시면 총탄 자국을 확인할 수 있는데. 최초의 한국은행권이 언제 발행됐는지 아시는 분 있으신가요? 바로 6·25 전쟁 중입니다. 한국은행은 이제 전쟁이 1950년 6월 12일에, 한국은행이 1950년 6월 12일에 설립됐고 6월 25일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게 됐는데, 6월 25일에 전쟁이 시작되니까 한국은행은 바로 전시 금융 체제로 전환을 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보관하고 있던 금이나 은괴를 후송하고, 다 옮기지 못한 금, 은, 조선은행권 이런 것들은 그 당시 북한군한테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한국은행이 새로운 은행권을 빨리 한국 은행권을 만들어서 북한군의 통화 교란에 대비하자, 그리고 현금 부족 사태에 대응하자 이런 움직임을 보였는데. 그래서 긴급조치권을 발동해서 한국은행이 7월 22일에, 1950년 7월 22일에 이제 최초로 한국은행권을 발행합니다. 그만큼 한국은행은 전쟁 중에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군인과 같이 총칼을 들고 싸우는 건 아니지만 나라 경제를 지키기 위해서 일을 했다는 점을 말씀드리면서. 이제 그만큼 중요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기관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이만 제가 준비한 강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