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성장 위기 속에서 바이오헬스 산업(제약·의료기기)이 신성장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다. 고령화로 인한 의료 수요 증가와 생명공학-AI 융합 가속화로 향후 5년간 글로벌 바이오헬스 시장은 연평균 5.0% 성장할 전망이다. 이는 국내 주력 산업인 자동차 성장률(2.7%)의 약 두 배에 달하는 수치다.
2. 국내 바이오헬스 산업은 바이오시밀러(복제약)와 CDMO(위탁생산개발) 등 틈새시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했으나, 혁신생태계가 미흡하여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혁신 신약과 첨단 의료기기 분야에서는 선도국과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세계 매출 상위 30위 내에 포함된 국내 기업은 없으며, 국내 1위인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매출(28억 달러)도 글로벌 상위 3개 제약사 평균(578억 달러)의 5% 수준에 불과하다.
3. 이는 특허 등을 통해 고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원천기술의 부족에 기인한다. 실제로 2016~2023년 미국 내 바이오헬스 특허출원건수는 세계 9위에 그쳐, 전체 분야 순위(4위)에 비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2024년 의약품 개발 기술 수준도 미국과 3.6년의 격차가 있으며, 특히 중국에 대한 상대적 기술 우위가 희석된 상황이다.
4. 최근 AI 기술이 바이오헬스 산업의 경쟁 구도를 재편하는 ‘게임체인저’로 부상하면서, 우리나라는 기존 혁신생태계의 한계를 넘어설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AI는 신약 개발 기간을 .30∼50% 단축하는 등 R&D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하고 정밀 의료, 수술 보조 로봇 등 신시장을 창출함으로써, 우리나라와 같은 추격국이 선도국을 추월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5. 우리나라는 우수한 바이오 데이터 수집·연계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어 이러한 기회를 실현할 충분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단일 건강보험제도를 기반으로 수집하는 5천만 인구의 건강보험 및 병원 임상 데이터는 ‘AI 시대의 다이아몬드’라 불릴 만큼 세계적으로도 희소성이 높은 국가 전략 자산이 될 수 있다. 이에 더해 미국 출원 AI 특허와 FDA 승인 AI 의료기기 건수 모두 세계 4위를 기록해 글로벌 수준의 AI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서울은 세계 2위 규모의 글로벌 임상시험 유치 도시로서 높은 의료 인프라를 입증하고 있다.
6. 이러한 데이터 수집·연계 인프라를 바탕으로 대규모 고품질 바이오 데이터를 구축하고 전략적으로 활용한다면, 글로벌 선도 기업과의 공동 개발은 물론 다국가 임상시험을 주도하는 글로벌 바이오헬스 R&D 허브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7. 그러나 이 기회의 핵심인 바이오 데이터 활용은 저조하다. 2023년 의료·헬스케어 AI 기업의 81.4%가 ‘데이터 확보·품질 문제’를 주요 애로사항으로 지적했다. 이는 우수한 데이터 수집·연계 인프라를 갖추고도 정제, 공유 등 활용 단계에 병목 현상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8. [근본 원인] 바이오 데이터 활용이 저조한 데는 데이터 활용의 위험·비용은 정보주체(개인)와 수집관리자(병원)가 부담하는 반면 이익은 활용자(기업·연구자)와 사회 전체로 분산되는 ‘인센티브 불일치’가 작용하고 있다.
▪(정보주체: 개인) 공익적 활용 가치에는 공감하나 프라이버시 침해를 우려해 제공을 꺼린다. 설문 조사 결과, 데이터 제공 의향이 있다는 응답은 26.9%에 그쳤으며, 거부자의 52.5%는 해킹·유출로 인한 개인정보 침해를, 20.9%는 고용 차별, 보험 가입 거부 등 실질적 피해를 우려했다. 현행 사전 동의 및 비식별화 중심의 개인정보 보호 체계는 실질적 통제권을 담보하지 못해 신뢰를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
▪(수집관리자: 병원) 데이터 정제 비용, 법적·평판 리스크 등 부담이 크지만 보상은 미미하다. 이에 따라 공유 기피 및 데이터 독점이 합리적 선택이 된다. ‘2020년 보건의료정보화 실태조사에 따르면, 병원 데이터를 연구 목적으로 외부와 공유한 비율은 21%에 그쳤으며, 외부인이 단독으로 수행하는 연구의 경우 그 비율은 17.4%로 더욱 낮았다.
▪(활용자: 기업·연구자) 복잡한 접근·결합 절차, 법적 불확실성 등으로 적극적 활용이 어렵다. 2020년 10월∼2023년 10월 3년간 보건의료 분야 데이터 결합·활용 건수는 78건에 그쳤다.
9. [정책 방안]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소하고 데이터 활용을 활성화할 방안으로 ‘국가 승인형 바이오 데이터 개방 체계’(이하 국가 승인 체계)를 제안한다. 해당 체계는 사전 심사를 통해 법에서 정한 공익성 요건을 충족한 연구에 한해 데이터 활용을 승인하되, 승인된 연구에 대해서는 사전 동의 면제 등 규제를 완화하고 데이터 유통을 지원함으로써 인센티브 불일치를 완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공적 승인과 통제권 담보) 사전 심의·승인을 통해 법에서 정한 공익적 활용을 보장하고, 정보주체에게 언제든 활용을 거부opt-out하거나 재허용opt-back-in할 수 있는 통제권을 부여하여 신뢰 기반의 자발적 데이터 제공을 유도한다. 실증분석 결과, 이러한 ‘공익적 활용 보장’과 ‘정보 통제권 강화’ 정책은 일반신체정보 및 정신건강정보 제공 의향을 각각 8.2%p, 15.5%p 제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승인된 연구에 대한 규제 완화) 심사를 통해 공익성이 인정된 활용에 대해서는 사전 동의 면제, 포괄적 동의 허용 등 규제 완화를 통해 연구자의 법적·행정적 부담을 덜어준다.
▪(데이터 유통 생태계 활성화) 데이터 탐색부터 결합, 심의, 제공까지 일괄 지원하는 통합 중개 허브를 구축하고 데이터 중개사를 육성하는 등 데이터 유통 생태계를 활성화함으로써, 데이터 접근 비용은 낮추고 민간 병원 등의 고품질 데이터 생산·공유에는 합리적 보상 체계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공적 승인을 받은 연구가 실질적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한다.
10. [거버넌스]‘국가 승인 체계‘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EU의 ‘Health Data Access Bodies’와 같은 별도의 전담 기구 설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해당 기구는 독립성, 전문성, 재정적 지속가능성을 갖춰야 하며, 데이터의 직접 관리보다는 민간의 데이터 생태계를 지원하는 시장 조성자이자 신뢰 보증자 역할에 주력해야 한다.
11. [기대 효과]‘국가 승인 체계’는 바이오 데이터의 전략 자산화를 통해 저성장 국면의 우리 경제에 새로운 성장동력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데이터 시장 확대와 R&D 효율성 제고를 통해 글로벌 바이오헬스 R&D 허브 도약과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라는 선순환 구조를 이끌 것이다. 나아가 개인 맞춤형 건강관리부터 신약 개발, 정책 수립에 이르는 전 영역의 데이터 활용을 촉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국민 건강 증진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